-에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머리가 점점 둔해지는 게 느껴져. 예전에는 몰두했을 만 한 것들을 봐도 전과 같은 열정이 생기지는 않아.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난 거겠지? 하지만 내가 사고라도 당하지 않는 한 난 아마 50년 정도는 더 살아야 할지도 몰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거지? 반 년 전에 보낸 편지 한 통을 마지막으로 나는 너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반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너랑은 연락하지 못했는지 얘기해주고 싶었어. 연락이 뜸해지는 것에 대해서 너는 내심 서운하다는 내색을 비추곤 했었지.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해. 관계는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수 년 전에 네가 나를 붙잡았던 것처..
10월 31일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하기 위한 자료조사를 핑계로 학교 도서관에 다녀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왜 진작 책을 반납하지 않았냐는 사서의 핀찬을 들으며 내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의 연체료를 냈다. 전염병의 유행으로 몇 달 간 문을 닫았던 도서관은 내 기억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출 예약이 꽉 차있어서 빌릴 엄두도 못냈던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추리고 또 추려서 열 권 정도의 책을 빌렸지만 그 중 과제를 위해 빌린 책은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다. 전처럼 아무 계획 없이 그저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을 집어온 게 아닌데도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았다.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다룬 책들과 정..
10월 14일 네이버 블로그에서 주로 활동하게 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덜해졌다. 형식을 벗어난 글쓰기가 주는 해방감을 처음 맛보고 나니 나는 중독된 것처럼 그 느낌에 빠져들었다. 일기를 올리지 못한 두 달 동안 나는 오로지 나의 작업과 학업, 생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면서(여기까지는 지난 학기와 같다) 두 편의 에세이와 세 편의 영화 리뷰를 써서 올렸다. 재미없는 영화를 소재로 해서인지 아니면 내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상했던 것보다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에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의 타격은 더욱 컸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근 일주일 간 좀 더 이목을 끌 만 한 글감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사람들이 ..
8월 28일 인턴을 그만둔지 석달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수입이 고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급증하는 바람에 다음 학기에도 온라인으로 강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개강을 했더라면 지금 일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 문득 인턴과 학업을 병행해야만 했던 지난 학기를 회고해본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둘 중 하나는 포기했겠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그때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처음 맡는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허덕이며 강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근무 연장을 하던 그때.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한들 그때처럼 할 자신은 없다. 큰 시련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무난하고 평탄한 내 삶에서 그때만큼 ..
8월 4일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시점에서 보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술에 취해 고양된 상태로 며칠을 지내다가도 다시 일상적인 시련에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외로울 때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친구를 만났다. 심할 때는 거의 일주일내리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마지막 일기를 업로드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계속 그때처럼 쉼없이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몇 가지의 기본적인 조건만 갖춰진다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은 외면한 채. 기록으로 남길 만 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나는 단 한 문장도 적을 수가 없었다. 타인과 접촉하는 순간 나의 경험은 더 이상..
7월 16일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가 이제야 놓았던 펜을 잡는다. 지금 나는 혼자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혼자는 아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일기로 근황을 전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번 주 월요일까지만 해도 잦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종강 후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해가 뜨기 직전에 잠에 들어서 늦은 오후에 깨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번 주 월요일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당일 아침까지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병들어가는 몸과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 한 일이라곤 애써 나를 달래려는 R의 가슴에 비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렇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인 분의 소개로 입사하게 된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어요. 정말 기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만 찾아오더군요. 이따금씩 이것이 기회인지 시련인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잘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도 하고, 잠시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면서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크게 싸우거나 오래 전부터 세워온 계획이 좌절되기도 했지만 견디기 힘든 일들도 결국 지나고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희미해지더라고요.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조금 애석해집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충분히 기억될 만..
4월 20일 오늘은 다른 날만큼이나 평범한 하루였다. 좋아하는 글을 쓸 만 한 시간은 단 1분도 주어지지 않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날들 중 하루.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모 수업의 교수에게서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라...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말문이 턱 막힌다. 내가 사상으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10년이 넘었고 학문 분파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4년이 넘었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것은 터무니없는 반응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고 지적할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 중 하나를 꼽으라는 요구마저도 부당하게 느껴진다. 순간 속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울컥울컥 차오른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애써 무시하려..
4월 1일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시간은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번뜩이는 영감도 종이와 펜, 그리고 그것을 받아 적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살면서 그러한 순간을 얼마나 많이 지나쳤을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움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지난 몇 주 간 나는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버린 채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지냈다. 과제로 제출한 것까지 포함해도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 혹은 실컷 공들였지만 서투른 영어 실력 때문에 글 전체의 수준까지 형편없어진 것들이 고작이다. 그런 것들도 글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량과 내용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메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몇..
2월 19일 오늘은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기대하기는커녕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연락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와 어울리곤 했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스터디를 했었다. 사실 나는 그가 스터디의 모임장인지(아마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아니면 불참이 잦았던 스터디 회원 중 한 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스터디가 파한 후에 나와 연락을 끊었다가 삼 년 후에 불쑥 나타나서 같이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정확히는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영업하는 에어비앤비를 경영해보지 않겠냐는)는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나는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게 답장하기에 앞서 몇 분 간격으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