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기

2020년 2월 19일

염세 2020. 2. 19. 14:21

 

2월 19일

 

  오늘은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기대하기는커녕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연락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와 어울리곤 했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스터디를 했었다. 사실 나는 그가 스터디의 모임장인지(아마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아니면 불참이 잦았던 스터디 회원 중 한 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스터디가 파한 후에 나와 연락을 끊었다가 삼 년 후에 불쑥 나타나서 같이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정확히는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영업하는 에어비앤비를 경영해보지 않겠냐는)는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나는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게 답장하기에 앞서 몇 분 간격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게 너무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그는 나와 친분이 전혀 없고, 내 이름은커녕 나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가? 내가 사업 자금을 지출할 만 한 여유가 안 된다는 것도? 내가 아직 그 단계에 이르른 적이 없다는 것도?)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생각해보겠노라고 오늘 중으로 결정을 내리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흔히 누군가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할 때 내가 그것을 거절하는 방법이다. 이제 오늘 자정이 되기 전까지 그에게 답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그를 차단할 것인지를 결정하면 된다. 골치 아픈 문제로부터 잠시 눈을 돌릴 수 있어서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정확히는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우습게 보인 것 같아서 비참했다. 아무래도 그 때 그 시절의 나는 ‘퀴어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다고만 하면 모든 일에 뛰어들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그때의 내가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그 정도로 대책없게 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에 눈을 뜨자마자 약을 챙겨먹었건만 나빠진 기분을 다시 나아지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제는 일주일 넘게 해오던 배달 알바를 하러 갔다. 처음부터 갈 생각은 아니었다. 헌혈을 해서 영화관람권을 받기 위해서라도 알바를 건너뛸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마침 너무 가까운 콜이 뜨는 바람에 쉽게 돈을 벌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공교롭게도 가게는 대학 건물 안에 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대학은 방학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쯤이면 입학 절차도 다 끝났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할 때쯤 정문에서 생화를 판매하는 노점상을 보고 오늘이 졸업식임을 직감했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누군가의 이름 혹은 별명이 적힌, 졸업을 축하한다거나 취업 성공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들뜬 얼굴들이 보였다. 축하한다는 말, 자랑스럽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았다. 나는 휴학을 오래 하는 바람에 졸업 시기를 놓친데다가 앞으로 1년을 더 다닌다고 해도 졸업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졸업을 하게 된들 나를 축하해줄 사람도 내게 밝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생긴다고 해도 졸업 후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갚아야 할 빚이 있고(제때 이자를 내지 못해서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연 이율이 8%로 늘어났다. 적지 않은 이율 때문에 좀 더 이율이 낮은 곳에서 돈을 빌려서 그 빚을 먼저 청산할 생각이다) 이번 달 말에는 월세도 내야 한다.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도 있지만 진학은커녕 취업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사실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 한다. 파트너는 올해 들어서 대학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내가 졸업한 후에는 월세는 몰라도 생활비는 지원받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기 외에 다른 글을 썼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한동안은 과제가 아닌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글 쓸 시간은커녕 책 읽을 시간도 없다. 매일 조금씩 틈을 내서 조금씩 책을 읽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공부만 하는 사람과는 경쟁이 안 될 것이다. 영화 리뷰를 쓰기로 약속한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왓챠 구독료를 내지 못해서 오늘까지 영화를 다시 보지 못하면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는 일도 포기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성실하게 자신의 경력을 일궈온 사람들 뿐이다. 하다못해 늘 어울려 놀고 같이 집에서 밤을 새곤 하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J과 그의 애인이자 나의 지인이기도 한 K도 예외는 아니다. 나 혼자만 뒤쳐지는 느낌에 글을 쓰려고 펜을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뭘 해도 이게 맞는 길인 것 같지 않다. 가장 즐거웠던 일들마저 이제는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낀다. 인생에 대한 태도와 불온한 사상 때문에 평소에 경멸했던 사람들은 나와는 다르게 부지런히 움직여서 어떻게든 성과를 내서 나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난 벌써 스물 넷이다. 스물 두 살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 기대했던 나이다. 이제는 늦었다는 좌절감과 더 일찍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회한, 그리고 얼른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초조함에 머리가 아파온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4월 20일  (0) 2020.04.21
2020년 4월 1일  (0) 2020.04.01
2020년 2월 2일  (0) 2020.02.03
2020년 2월 1일  (0) 2020.02.01
2020년 1월 2일  (0) 2020.01.0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