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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년 7월 16일

염세 2020. 7. 16. 17:27

 

7월 16일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가 이제야 놓았던 펜을 잡는다. 지금 나는 혼자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혼자는 아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일기로 근황을 전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번 주 월요일까지만 해도 잦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종강 후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해가 뜨기 직전에 잠에 들어서 늦은 오후에 깨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번 주 월요일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당일 아침까지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병들어가는 몸과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 한 일이라곤 애써 나를 달래려는 R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토해내는 것뿐. 한 달이 넘게 이어지는 불면은 나의 모든 활력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수도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잠드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잠에 들지 못하더라도 계속 일상을 영위해나가야 한다는, 잔인하리만치 당연한 사실이었다. 불의에 눈감았다는 죄책감, 현실적인 투쟁보다는 지적 유희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그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이런 세상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작업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애초에 작업을 그만둔다는 선택지는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역대 최악의 디지털 성범죄라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도, 코로나 발발로 인해 극심해진 취업난도, 내가 경험한 폭력과 개인적인 시련들마저도 나의 목숨을 완전히 끝장낼 수는 없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질병은 투쟁과 지적 유희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대응을 잠정적으로 유예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핑계였다.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약을 먹고 끼니를 챙기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해나가야만 한다.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나의 하찮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아직도 나를 세상에 붙잡아둘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이. 허나 모두가 절망하거나 단념한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K와 C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경외심이 들다가도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들 또한 폭력과 착취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씁쓸하다 못해 비참해진다.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모든 것들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 – 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로 이루어졌다. 폭력과 착취에 물들지 않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무의미해 보인다. 이 세계에 속해 있는 한, 나는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더 불순해질 것이다. 절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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