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기

-에게

염세 2021. 1. 15. 02:09

-에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머리가 점점 둔해지는 게 느껴져. 예전에는 몰두했을 만 한 것들을 봐도 전과 같은 열정이 생기지는 않아.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난 거겠지? 하지만 내가 사고라도 당하지 않는 한 난 아마 50년 정도는 더 살아야 할지도 몰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거지? 반 년 전에 보낸 편지 한 통을 마지막으로 나는 너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반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너랑은 연락하지 못했는지 얘기해주고 싶었어. 연락이 뜸해지는 것에 대해서 너는 내심 서운하다는 내색을 비추곤 했었지.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해. 관계는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수 년 전에 네가 나를 붙잡았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먼저 너를 붙잡고 싶어.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결국 인턴은 그만두었지만 작년엔 운이 좋아서 좋은 알바자리를 소개받고, 용돈벌이를 위한 부업까지 할 수 있었어. 알바 일은 아주 재밌었어. 여태 했던 그 어떤 일보다 훨씬 수월했고, 부담이 덜했던 데다가 수입도 짭짤했어. 알바 일을 하다가 중간 중간에 시간이 날 때는 책을 읽고 공부를 했어. 지난 학기에는 주말 내내 밀린 강의를 듣는다고 부담이 적진 않았지만 다행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어. 부업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시작할 때는 조금 힘들어했었는데 적응하면서는 점점 괜찮아졌어. 벌써 부업도 한 달 후면 계약이 종료되는구나.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더 열심히 해봐야겠어. 지금에서야 그때를 돌아보면 좋았던 일부터 떠오르지만 사실 지난해는 그 어떤 해보다도 힘들었어. 엉뚱한 실수로 상사의 화를 돋우거나 사흘 동안 밤을 새서 과제를 해야 할 때도 있었지. 무엇보다도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할 시간이 부족했어. 작년 가을쯤에는 집안 사정 때문에 급하게 집을 빼야 했거든. R이 알아봐준 덕분에 괜찮은 조건에 집을 계약할 수 있었지만,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던 중에 이사 준비까지 해야 하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이사에 관한 대부분의 일은 R이 도맡았지만, 이삿날의 새벽에는 짐을 싸느라 밤을 꼴딱 새운 채로 알바를 하러 가야 했어. 알아, 정말 힘들었지. 하지만 R만큼은 아니었을 거야. R은 그 짧은 새에 집을 계약하고 청소 업체와 이사 업체를 알아보느라 이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결국 이삿날 새벽에 짐을 싸면서 R은 완전히 정신을 놓고야 말았어. 다행히 그 시기를 잘 이겨냈지만 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곤 해.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경기도에 있는 G시에 이사를 왔어. 서울과의 거리가 애매하고 교통이 불편해서 인구가 감소 중인 도시라고 해. 그래도 집 근처에는 대형마트와 쇼핑몰, 극장과 식당 등의 편의시설이 있어서 이 곳에서 살면서 불편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어.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면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피부에 느껴졌고, 가끔은 공기에서 나는 풀냄새와 갈대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 사람들은 조용하고 친절했고, 피곤에 찌들어 날이 서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어. 거의 모든 도로에는 자전거 도로가 있었고, 모든 거리가 다 산책로처럼 느껴졌어. G시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G시는 한국에서 P시 다음으로 내가 애정을 가지는 곳이야. Y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도 마음에 들었어. 우리는 자주 만나서 얘기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먹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어. Y와의 관계는 그 어떤 사람과의 관계보다도 내게 힘이 됐어. 아마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좀 더 많아서겠지. 상담사도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서 더 의지가 됐던 것 같아. 언젠가는 Y가 내게 힘이 되어주었던 만큼 내가 Y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Y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집에 와주는 친구들이 있었어. 특히 작년에 자주 만나 놀곤 했던 J가 집에 방문했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어. 너무 기쁘고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를 확인해야 했지. J가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나는 J에게 책 한 권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었어. J가 그 부탁을 들어줘서 얼마나 기쁘던지. 서양 철학사를 망라하는 책인 만큼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10대를 대상 독자로 삼은 책이기에 읽을 때는 아주 수월했어. 사실 이 책은 J의 것이 아니라 J가 그의 사촌에게 빌렸다가 내게 빌려준 책이라고 해. 책을 읽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책 중간 중간에 J가 남긴 메모를 보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즐거웠어. 책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 철학자가 어린 여자 아이에게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대목에 남긴 짧은 메모에서도 J의 주관을 엿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지. 그리고 그가 메모를 남겨준 덕에 이런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고비를 완전히 넘긴 건 아니지만 Y 그리고 J과 같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서 무너질 것 같다가도 힘을 얻곤 해. Y나 J가 나를 대하는 것처럼 내가 너를 대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너에게 다가가고 너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러니 이런 나의 마음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어쩌면 나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너를 알고 싶고 이것만큼은 확실해. 만약 이 편지를 받게 된다면 내게 답장을 해주지 않겠니? 네가 마음을 먹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나는 기다리고 있을게.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10월 31일  (1) 2020.10.31
2020년 10월 14일  (0) 2020.10.15
2020년 8월 28일  (0) 2020.08.28
2020년 8월 4일  (0) 2020.08.04
2020년 7월 16일  (0) 2020.07.16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