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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년 5월 10일

염세 2020. 5. 11. 01:31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렇게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인 분의 소개로 입사하게 된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어요. 정말 기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만 찾아오더군요. 이따금씩 이것이 기회인지 시련인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잘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도 하고, 잠시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면서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크게 싸우거나 오래 전부터 세워온 계획이 좌절되기도 했지만 견디기 힘든 일들도 결국 지나고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희미해지더라고요.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조금 애석해집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충분히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던 일들이 준 교훈마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그래도 그 시간 동안 제게 적잖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등교만으로도 일상을 유지하기 벅차했던 제가 수개월 후에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상황이 열악할수록 더 치열하게 분투하나 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수 년 전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일도 분명 있으니까요. 운 좋게도 저에게는 곁을 내주고 제가 무너지기 직전에 저를 지탱해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분들에게는 늘 감사하고 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최근에 제게 일어났던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만 간추려서 말씀 드리려 해요. 첫 번째는 사수에게서 본인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말을 들었던 일이에요.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제가 경력이 없고 서툴러서 놀란 모양이에요. 사수는 완곡한 어투로 그에 대해 지적했지만 다행히도 그 날 아침에 약을 챙겨먹은지라 금방 말의 요지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해 보라며, 그 편이 회사 생활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맥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가 사담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 그냥 그렇게 넘기게 되었어요. 아 편지를 쓰다보니까 우리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군요. 좋아하는 게 있냐는 그의 말에 저는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어요. 별로 가깝지도 않은 그에게 솔직해질 수도 없을뿐더러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건 최소한 절반쯤은 사실이기도 했거든요. 저는 좋아하는 일이 많지만(아마도 새벽에 R와 산책을 가거나 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것, 그리고 관심 있는 화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를 하거나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등) 그 어떤 것도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고,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수 없었어요. 그는 저의 대답을 듣더니 좋아하는 게 없다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요. 당장은 좋아하는 게 없어도 어떤 계기로 좋아하는 게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 한 무언가를 발견할 기회가 아직 많기도 하고요. 그래도 전 듣고만 있었어요. 그 사람과 언쟁을 하는 게 제 목표는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그 언쟁에서 이긴다한들 저는 제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거예요. 그 어떤 것도요. 그는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고, 저는 대화를 종결짓기 위해 몇 가지 흔히 있을 법한 관심사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게임을 하거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같은 걸로요. 그 뒤에 이루어진 대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좀 더 열심히 떠올려보면 떠오를 법도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요. 저는 그가 조금 주제 넘는다고 생각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어요. 저는 그의 얘기를 재밌게 듣고 있었답니다. 남의 눈에 본인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알아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은 드무니까요. (그의 앞에서) 과묵한 저와는 달리 그는 쉼 없이 저에 대한, 인생에 대한 저의 태도와 저의 성격 따위에 대한 평가를 늘여놓았어요. 그는 제가 선량한 사람이라 하며 그것이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말도 덧붙였어요. 그는 제가 물욕이 없고 경력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양이에요. 착하다는 말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칭찬이 될 수 없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제가 의도한 바였고, 저의 가장 큰 목표는 이 회사에서 수개월 간 버티며 많지는 않지만 적절한 액수의 돈을 벌고 나가는 거였으니까요. 모든 직원에게 요구되는 적절한 수준의 성실함 이외에 저는 그 어떤 것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착하다는 말은 저와 가장 거리가 먼 수식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의 사상과 가치관은 어딘가 비틀려있고, 건강하고 보편적인 것이라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저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할 때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답니다. 저는 욕심이 없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요. 단지 원하는 게 수중에 쥐여지는 돈이 아닐 뿐이죠. 제가 원하는 것은 명예와 권력이며 그것을 얻고 싶어 하는 경로가 정해져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경로로도 그것을 획득하고 싶지 않았어요(그렇게 할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만요). 한 가지 측면만으로 저에 대한 모든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게 씁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는 저를 사수로서 만났고, 그가 다른 경로로 다른 이유로 저를 만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일화였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었어요. 제가 인정받는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도 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본인의 재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요. 굼벵이조차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던데. 아마 그래서 제가 시답잖은 글을 쓰면서도 즐거워하는 거겠죠. 남들 눈에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언정 저는 글을 쓸 때 제일 즐겁고 행복합니다.

두 번째는 며칠 전에 연인이자 동거인인 R과 말다툼을 한 일이에요.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R이 말싸움을 하다 말고 일정 때문에 문 밖을 나선 후에도 분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싸우는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상대적으로 심각한 것까지 다양했지만, 싸움의 레파토리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늘 저는 노력했다고 말하고 그에 R은 충분히 노력하진 않았다고 말하죠. 하지만 결국은 매번 R의 말에 수긍하게 된답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죠. 그 날도 그랬어요. R이 떠난 후 홀로 방안에 남겨진 저는 R이 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어요. 제가 가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여러 키워드로 검색을 하던 중에 ‘자기 자비’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불교로부터 영감을 받은 심리학 개념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금방 그 개념의 유용성에 그야말로 매료되고 말았지요. ‘자기 자비’를 처음 제안한 크리스틴 네프는 수차례의 강연을 통해서 현재까지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여겨졌던 ‘자아 존중감’이 가지는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 ‘자기 자비’가 ‘자아 존중감’보다 유용한 개념인지에 대해 설명했어요. 특히 그는 자아 존중감이 성과 중심적인 개념이며 심지어는 타인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했지요.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비’는 ‘자아 존중감’과는 달리,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과 타인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이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개념이라고 덧붙였지요. 무엇보다도 통념과 달리 실패야말로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보편적이며, 실패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그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인 이상 다른 인간들처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할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점이 인간을 제일 인간답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실을 깨닫고나서야 비로소 R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R과 화해를 하고 다른 날과 별 다를 것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지라 괜찮습니다. 이제 이 편지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네요. 부디 다음에 편지를 쓸 때는 제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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