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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년 4월 1일

염세 2020. 4. 1. 13:48

 

4월 1일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시간은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번뜩이는 영감도 종이와 펜, 그리고 그것을 받아 적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살면서 그러한 순간을 얼마나 많이 지나쳤을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움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지난 몇 주 간 나는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버린 채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지냈다. 과제로 제출한 것까지 포함해도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 혹은 실컷 공들였지만 서투른 영어 실력 때문에 글 전체의 수준까지 형편없어진 것들이 고작이다. 그런 것들도 글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량과 내용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메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몇 주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쓸 만 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잊어버리기를 반복했다. 그것이 파편화된 기억의 형태로 다시 떠오른들 처음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의 열정과 감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북 리뷰를 일기 형식으로 쓰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라든가, 우연히 한 예능 방송을 보고 든 감상을 담아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대한 리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라든가, 국내에서는 게이 밈(meme)으로 알려진 ‘what's up’라는 노래가 사실은 4 non blondes라는 이름의, 레즈비언임을 오픈한 린다 페리가 보컬로 활동하던 그룹의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때의 환희와 열정은 당장 작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버린다. 조금이라도 사유를 확장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더라면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예능 방송을 보면서 숟가락을 뜨던 그 순간에, 주방 세제로 그릇을 헹구면서 노래를 듣는 그 순간에, 아니면 알바를 하던 PC방에서 유리 파티션을 닦던 그 순간에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번뜩 떠오르는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두었더라면. 막상 그런 순간에는 그때 떠오른 생각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행여 누가 볼까 하는 막연한 불안함에 최대한 간결하게 적어두었지만, 원래 기회의 여신이 완전히 뒤돌아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 뒤통수를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본인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다가 막상 작업에 착수할 만 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확보되면 메모지나 영수증 뒤편에 휘갈겨진, 알아볼 수도 없고 당연히 그 의중도 알아볼 수 없는, 맥락 없는 단어와 문장만이 수중에 남아있게 된다. 지금의 나처럼. 그 어떤 단서나 도구도 없는 채로 노트북 앞에 앉아서 몇 분 후의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 늦어버리기 전에 뭐라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생각이라 해도 - 어차피 그 시점으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유용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완전히 그 생각으로부터 흥미를 잃어버리기 전에, 1970년대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흔해빠진 락 밴드에 대한 감상을 써야 한다. 여태 했었던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마약과 파티, 섹스를 예찬하는 가사는 분명 그것이 자유주의의 정점에서 탄생했음을 알리고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왜 자유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그 답은 내가 우연한 계기로 듣고 있는 이 노래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유를 예찬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단지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한 주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 밤과 같은 해방감을 원한다.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파티의 한 가운데서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 사람과 특별하고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사람과 거리를 걷고,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장 좋아하는 화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자유라는 말에는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아름다운 순간이 담겨있었고, 평범함과 진부함이 낄 자리는 결코 없었다. 그들은 늘 최선을 위해서만 산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위해서. 때문에 그들은 더 많이 기대하고, 더 많이 실망한다. 어쩌면 나와 같은 사람이 그들에게는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일은 너무나 당연할지도 모른다. 늘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꾸물거리며 사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 그렇다고 우리가 낙담했다거나 비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서로 상반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스펙타클의 정점에 현혹될까 봐 그래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봐 두렵다. 아무리 소모적이고 공허한들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게 인간의 속성이니까. 아름다운 장면을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희생된 것을 보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쩌면 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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