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S와 교환 일기를 쓰려고 비트윈을 깔았다. 회원가입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가입된 메일이라는 알림이 떠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그인을 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대문짝만하게 찍힌 나와 구애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탈퇴를 할까 하다가 그것조차도 귀찮아져서 다른 메일로 다시 회원가입을 했다. 다행히 회원가입에는 성공했지만 이런 어플을 제대로 사용해본 경험이 없어서 한동안이나 헤멨다. 채팅부터 포스팅까지 모든 게 낯설었지만 S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해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교환 일기를 쓰게 된 것은 내가 더 이상 공개적으로 공개할 만 한 일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8월 19일 애인을 병원에 두고 집에 왔다. 더위가 한 풀 꺾인지라 방 안이 좀 꿉꿉하긴 했지만 아주 덥지는 않았다. 나는 집이 휑하다고 느꼈다. 나카모리 아키나가 자신의 애인과 사별했을 때쯤에 불렀던 ‘난파선’의 구슬픈 선율과 함께 한 줄의 가사가 떠올랐다. 단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뿐인데, 그 어떤 것도 사라져버렸다는 그 가사를 떠올리며 나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의 삶에서 R이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잠시 곁을 지킬 수 없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데 어느 날 정말로 그를 잃게 된다면 나는 그로 인한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설사 그럴 수 있다한들 그를 잃은 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운명이 나에게서 그를 앗아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모든..
7월 23일 살을 태우는 듯 뜨거운 공기는 며칠새로 좀 선선해지는 듯 했다. 여름철 내내 뇌가 녹아있었던 기분이었는데 오랜만에 머리가 맑았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생각들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라 머릿속을 덮어버린다. 날은 덥고 기운은 없지만 일을 해야 한다. 푼돈이라도 벌 수 있는 일과 집안일처럼 당장 돈이 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 우리는 둘이서 40만원 남짓의 돈으로 한 달을 버텨내야 할지도 모른다. 주말 알바 외에 아무런 부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주까지 했던 단기 알바의 급여가 안 들어오고 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여윳돈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설사 단기 알바 급여가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은 묶여있는 돈이라 당장의 생활에는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6월 7일 벌써 6월이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R은 며칠 전부터 계속 앓는 중이다. 늘 그렇듯이 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아파하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나는 무력하다. 나는 그를 위해서 복수를 해줄 수도 없고 그의 피해를 대신 보상해줄 수도 없다. 자책하는 나에게 R은 아마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어쩌면 사실에 가깝겠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지 못한다면 - 이미 물 건너간 일이지만 – 그가 나를 만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의 아버지를 저주하는 상상을 했다. 그를 찾아가서 죽일 수도, 죽을 만큼 고통스러..
5월 28일 쓰고 싶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이 사실이 내게 얼마나 큰 좌절감을 주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책을 읽고 싶다. 의 후반부를 마저 읽고 싶고, 도 읽고 싶다. 특히 메리 댈리의 저서를 읽는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만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읽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 일단 내게 청구된 미납연체료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지금 빌리고 있는 책을 연장 대출하는 것도, 다른 책을 빌리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지만 그 어떤 과목도 제대로 대비한 것 같지가 않다. 하버마스, 푸코, 부르디외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에 대해 소개한 수편의 영어 논문도 읽지 ..
5월 27일 오늘은 바람이 선선했습니다. 어제 밤중에 비가 왔거든요. 초여름의 더위도 비에 씻겨 내린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어요. 만약 평소대로였다면 저는 연인인 R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산책을 하러 갔을 거예요. 만약 오늘 제가 씻지도 않은 채로 잠옷 바람으로 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요. 저는 오늘 수업이 시작하기 20분 전에 눈을 떠서 지각하지 않기 위해 15분 동안 강의실로 달려가야 했어요. 숨 가쁘게 달리면서도 저를 저 밑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어요. 저는 그걸 뿌리치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렸습니다. 호흡은 점점 더 가빠지고 폐는 터질 것 같았어요.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제가 느꼈던 감정들과는 무관하게요.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5월 14일 책상 앞에 앉았다. 턱을 괴고 눈알을 굴리며 A4 용지 다섯 장에 글자를 채워 넣을 궁리를 했다. 책상은 아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정돈된 상태이다. 적어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로션과 선크림 따위가 든 바구니와 필기구가 제멋대로 꼽혀있는 원통형의 필통. 그 사이에는 스탠드가 있고 스탠드의 좌측에는 읽어야 하지만 끝내 읽지 못했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래도 작업할 만 한 공간은 남겨둔 상태이기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책장 옆에는 침대가 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턱없이 작은 침대라 둘 중 한 명은 바닥에서 자야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R은 인형처럼 얌전한 자세를 취한 채로 잠에 들었다. 그의 잠이 깊어질수록 방 안의 온도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4월 2일 어제는 만우절이었다. 신학기의 여운이 남았는지 모두들 들떠있었다. 주름이 잡힌 깔끔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어딘가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서럽다. 그뿐이다. 오전 수업에 쪽지 시험을 쳤다. 애써 외우려 하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늘 그랬던 것처럼 죽을 쒔다. 자음의 동화와 이화의 사례를 찾아보라며 모둠활동을 하라는 교수의 지시에 잠깐 정신이 들었다가 만다. 한때는 어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5년 전의 나는 누구보다도 중국어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대단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쩌다가... 그러나 나는 쉽게 흥미를 가..
3월 2일 무릎 관절이 시리듯이 아프다.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통증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꽤 오랫동안? 나는 몇 시간 전의 일도 어제와 같이 느껴버리는 이상한 뇌를 가지고 있기에 그 말에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을지는 모른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꽤 오랫동안이라는 말이다. 나는 불현 듯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마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몸의 통증처럼,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때에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내게 찾아온다. 그와 같은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글을 쓴다고들 한다. 혹자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도피하고 싶다고 하고, 혹자는 너무나 고독하여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글을 쓴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