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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년 8월 28일

염세 2020. 8. 28. 11:44

 

 

8월 28일

 

  인턴을 그만둔지 석달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수입이 고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급증하는 바람에 다음 학기에도 온라인으로 강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개강을 했더라면 지금 일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 문득 인턴과 학업을 병행해야만 했던 지난 학기를 회고해본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둘 중 하나는 포기했겠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그때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처음 맡는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허덕이며 강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근무 연장을 하던 그때.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한들 그때처럼 할 자신은 없다. 큰 시련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무난하고 평탄한 내 삶에서 그때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도 수 년 후 나의 미래는 영원히 미뤄진, 도착하지 않을 시간으로만 느껴진다(철학적으로는 동의할 만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소망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고, 내가 갈망하는 것들을 쟁취할 만 한 시간. 그것이 과연 기다리고 고대할 만 한 것이긴 한 걸까. 그럴 만 한 가치가 있긴 한 걸까. 마스다 미리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에 나오는  열정 없고 무기력한 카페 알바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정말 변화를 원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적어도 새로운 곳에 발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만 한 열정도 시간도 돈도 없다. 어제는 프랑스 유학을 간 철학과 학생의 자전적인 에세이를 읽었다. 생각난 김에 그 책을 마저 읽고 싶었지만 무료 공개분이 거기까지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사라 아메드가 새로운 에세이집을 내지 않는 한 내가 에세이집을 돈 주고 사는 일은 없을 테니 그 책과 나의 인연도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안녕, 에세이집, 내가 돈이 남아 돌아서 한 번 펼쳐본 책은 다 사버리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안녕. 나는 책을 구입할 돈도 수납할 공간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책을 살 때마다 아주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해쯤 어쩌다 지나친 작은 독립 서점에 들렀을 때도 책들을 서가째로 집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와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 사이에서 고민해야만 했다. 나는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를 샀다. 레비스트로스보다는 알튀세르를 좋아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를 사는 게 더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알튀세르의 것에 비해 좀 더 입문자용에 가까웠거나 활용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독립서점에서 쓸 돈을 아껴서 인터넷 주문을 시켜서 돈을 아끼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의 가격은 대형 온라인 서점의 판매가와 거의 차이가 안 났다. 그때는 조금 여유가 있었을 때였기 때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 책을 미리 읽는 값(몇 천원 가량)을 기꺼이 지불하기로 했다. 그때 루소 강의를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지 그 사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한 두 해쯤 지난 시점에 대학 도서관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빌리러 갔던 날 운명처럼 그 책과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 책을 빌려왔다. 전자책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나서 루소 강의를 빌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살면서 과거에 했던 선택에 대해 후회하며 자책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탁월한 선택으로 2만원 남짓의 거금을 아낄 수 있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과거에 내가 내린 판단 덕에 나는 2만원 중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근무 시간을 틈타서 루소 강의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과거에만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루소 강의를 읽을 수 있다. 지금 나의 직장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직장 그 자체다. 제때 출근하고, 경력 1일차도 할 만 한 기본적인 업무를 한 후에 카운터에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업무 중간 중간에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수도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도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삶이라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아직 성공하지 않았거나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연구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지금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 재단에서 받은 40만원이 책을 읽거나 글을 써서 얻은 수익의 최대한이었다. R의 인생사를 구술 생애사 연구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글 한 편과 R이 수술하기 전날에 쓴 일기 한 편에 대한 대가였다. 글 한 편당 10만원이 넘는 돈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 나는 로또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에 거의 보름 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장 생활비가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S사의 큐빅 반지로 커플링을 맞출 생각에 내내 들떠있었기 때문이다(결국 R에게 들키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래도 평소라면 살 엄두도 못냈을 스마트워치를 사줄 수는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 몇몇 국가들) 소재의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하면, 혹은 누구처럼 평론가로 이름이 나서 정기적으로 글을 쓸 만 한 지면을 얻을 수 없다면, 이게 내가 글을 쓰는 대가로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질 법도 하지만, 젊음 빼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 특유의 낙관과 대책 없음을 백분 발휘하여 우울 사고에 빠질 위기를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좀 더 계획성이 있었더라면 뒤늦은 후회를 막기 위해서라도 대책을 세웠겠지만, 젊음의 끝자락에 다다른 내가 가진 유일한 계획은 상황이 아주 나빠지기 전까지는 낙관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즐겨야지. 인생은 짧다. 청년이라 불릴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짧다. 그러니 대책 없이 살다가 죽어버리자, 라고 하면 마누라가 화낼 테니까, 완전히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는 즐겨두자. 지금부터 진로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니 취업 준비는 이제부터 해야 안 늦는다니 하는 진심 어린 조언따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버리자.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게 있다면 평생 이렇게 살지는 못할 거라는, 가능하다면 영원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광주는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에 돌입했고, 서울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내가 일하는 매장 뿐만 아니라 쇼핑몰 전체에도 손님이 너무 없어서 나는 동독 시기의 매장 직원처럼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지금 일을 오래하기 위해서라도 손님 수가 늘어나길 빌어야 할 정도였다. 맞은편에 있는 옷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도 가만히 있기엔 눈치가 보였는지 상품 정리를 하는 척 하면서 자꾸만 옷끝을 만지작거렸다. 하루 빨리 사태가 진정되어야 할텐데. 그래도 내년에는 백신이 개발된다 하니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몇 번이고 반복되던 나와 점장 사이의 무의미한 대화가 뇌리를 스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 느낌을 무시하기 위해서라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노트북에서는 몇 번이고 재생하던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 노랫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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