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감(異人感) 작년 12월은 그야말로 악재의 연속이었다.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떠올리는 것조차 내게 타격을 주었기에 그 어떤 것도 남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이유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내가 쓴 글이라고는 상담사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작성된 메모뿐이다. 12월 중순쯤에 나는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단기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차라 상담치료를 거듭하면서 증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기만 여전히 치료에 대한 회의감을 버릴 수는 없다. 상담사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방어적인 내담자로부터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데 능숙했다. 불과 삼 회 차 만에 그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는 과장..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생각해. 오늘도 고리타분한 하루의 시작이라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수 백 수 천 번씩 죽기로 결심하기를 반복하곤 했었지. 마치 내일이 없다는 듯이 살아볼 수 있다면 오늘을 견뎌낼 수 있을 것처럼. 며칠내리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도 내가 사는 세상에 비하면 그것은 그저 달콤한 단잠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다. 새벽쯤 잠이 들고 오후에 눈을 뜨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부턴가 발밑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난 정말 이 곳에 있고 싶지 않았어. 이 곳에 속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지. 그러나 떠나는 것만은 더더욱 할 수 없었어. 내 마지막 남은 희망은 무참히 짓밟히고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는커녕 다시 일어설 힘조차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운수 좋은 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할 일을 곧잘 미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이변이 생겼는지, 그러니까 그날따라 기분이 좋거나 몸을 움직일 기력이 남아돌았는지 아니면 그날도 늘 하던 대로 시간을 허비하다가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예감에 섬찟했는지 이유야 어찌됐건 그 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허비한지 꼬박 21일째에 문득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미처 감지 못한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삐죽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서 기름기가 껴서 번들거렸다. 계속 두피가 간지러워서 도저히 침대에 편히 누울 수가 없었다. 전기장판은 당장이라도 살을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고(충분히 낮은 온도..
근황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어떤 일에도 감흥이 없다. 점점 더 깊은 물속에 잠기는 것 같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 국경 안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국경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 – 그곳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고 있다 - 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에 나는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게 되겠지.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여기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의로 가득 찬 이 장소를 등질 수만 있다면. 내게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이 남아있고 그 어떤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좋지 않은 소식들만 들려온다. 내가 증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소식이라든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원을 분배받고 그것을 독차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선한 사람들은 계속 시련에 처하고 악한 사람들은 벌받지 않는다. 너무나도 자명하고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애인이 부모 문제로 – 그가 응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유소년기부터 물리적, 정신적 학대를 학대를 당한 것 때문에 – 힘들어할 때 나는 정말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그에게 가해한 인간들을 찾아가서 죽일 수도 없고(심지어 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피해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해줄 수 있을 만큼의 경..
여느날과는 다르게 상쾌한 아침이다. 아마 어제 푹 잘 수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술에 취한 채로 잠들면 피곤하다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아주 지쳐버리지 않는 한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난 잠에 들기가 두렵다. R만큼은 아닐지라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내 존재의 유한함을 상기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때문에 지쳐 쓰러져 잠드는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어제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는 바람에 속이 더부룩했다. 토하고 싶지 않아서 복약 시간을 뒤로 미뤘다. 학교에 가기 전에 간편죽이라도 먹고 가려 했건만. 씻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늦게 일어난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은 중한 번역 강의를 듣는다. 기껏 열심히 준비해간 번역 과제였지만 사실은 볼품 없는 결과물이었음을 실시간으로 확인..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한 적이 있나요? 어쩌면 황당한 질문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가 지금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는 지금 제가 썼던 베개를 베고 저와 함께 덮던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었습니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잠들기가 두렵다는 말을 내뱉던 게 기억이 납니다. 가끔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들 우리는 아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저는 그가 꿈꾸는 세상만이 아름답고 제가 꿈꾸는 것은 그러한 세상을 파괴하는 것뿐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지만 절대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질적인 존재인 것은, 너무 당연해서 부정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사실입니..
그 일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일기를 못 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제때 일어나고 제때 밥을 먹고 이따금씩 가까운 공원에 찾아가기도 한다. 나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당장 거리에 나앉지도 않았고,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항상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데 비해 너무 많이 가졌다고 말한다. 아마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특별히 재능이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많이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토록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은 정말 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저 온갖 ..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낡은 질문에 잠식당한다.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지 못한다. 답을 알지 못해서 앞을 향할 수 없다.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사실 나는 내 뒤에 무언가 있었으리라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면 못내 두려워진다. 왜 나는 그 질문들을 떨쳐낼 수 없을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오랜 습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물건을 쌓아두기를 잘한다. R과 동거하기 전에 나는 과자 봉지 하나조차도 제때 버리지 못했다. 나는 물건들을 사랑했다. 누군가 – 주로 나 자신의 체취가 남은 물건들. 과자 봉지, 페트병 뚜껑, 메모가 휘갈겨진 종이더미와 종이컵에 담아둔 담배꽁초들. 그 물건들은 공간을 차지하고, 몇몇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나는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다. 지켜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