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머리가 점점 둔해지는 게 느껴져. 예전에는 몰두했을 만 한 것들을 봐도 전과 같은 열정이 생기지는 않아.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난 거겠지? 하지만 내가 사고라도 당하지 않는 한 난 아마 50년 정도는 더 살아야 할지도 몰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거지? 반 년 전에 보낸 편지 한 통을 마지막으로 나는 너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반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너랑은 연락하지 못했는지 얘기해주고 싶었어. 연락이 뜸해지는 것에 대해서 너는 내심 서운하다는 내색을 비추곤 했었지.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해. 관계는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수 년 전에 네가 나를 붙잡았던 것처..
이인감(異人感) 작년 12월은 그야말로 악재의 연속이었다.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떠올리는 것조차 내게 타격을 주었기에 그 어떤 것도 남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이유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내가 쓴 글이라고는 상담사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작성된 메모뿐이다. 12월 중순쯤에 나는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단기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차라 상담치료를 거듭하면서 증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기만 여전히 치료에 대한 회의감을 버릴 수는 없다. 상담사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방어적인 내담자로부터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데 능숙했다. 불과 삼 회 차 만에 그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는 과장..
본격적인 작품 감상에 앞서 먼저 시인인 두목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려 한다. 두목은 주로 당대 후기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문체와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두보와도 유사성이 있어 노두 두보의 뒤를 잇는 '소두'라 불리기도 했다. 두목의 시 중에서도 '박진회'는 그의 대표작으로, 심덕잠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에게 절창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 시의 갈래는 근체시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칠언절구로 분류될 수 있다. 근체시는 당대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엄격한 형식을 지닌 시 갈래이다. 근체시는 이전 시대의 시와 당대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으로, 이전 시대의 시는 고체시로 분류된다. 그런데 당대에 생산된 모든 시가 근체시인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가 근체시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평측, 압운, 대구, 장법 등의 요..
10월 31일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하기 위한 자료조사를 핑계로 학교 도서관에 다녀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왜 진작 책을 반납하지 않았냐는 사서의 핀찬을 들으며 내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의 연체료를 냈다. 전염병의 유행으로 몇 달 간 문을 닫았던 도서관은 내 기억속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출 예약이 꽉 차있어서 빌릴 엄두도 못냈던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추리고 또 추려서 열 권 정도의 책을 빌렸지만 그 중 과제를 위해 빌린 책은 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다. 전처럼 아무 계획 없이 그저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을 집어온 게 아닌데도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았다.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다룬 책들과 정..
1. 사회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문화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 대체로 누군가가 소유한 문화 자본은 그가 속해있는 계층의 영향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자본의 소유 정도가 문화적 자본의 소유 정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하위 계층에 가깝지만 막대한 부를 소유한 사람도 있고, 문화 자본의 측면에서는 상위 계층에 가깝지만 그에 걸맞는 경제적인 자본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의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러한 반례가 발생하는 데 가장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회 계층 이동인데, 계층 하향 이동을 경험한 사람이 소유한 문화 자본은 더 이상 그의 계층을 나타내는 지표라 보기 어려울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격적으로 문화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문화 자..
본격적인 작품 감상에 앞서 먼저 전근대 시기의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전근대 문학을 감상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닌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전근대인과 현대인은 다른 종류의 경험을 하고 살아간다. 이는 물적, 기술적, 경제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고, 정치 체제, 법/제도를 포괄하는 사회 구조로 야기된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경험의 차이가 가치, 규범, 관습, 언어 등 문화적인 차이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각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정치, (기술의 발전으로 추동된) 경제, 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긴밀하게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
10월 14일 네이버 블로그에서 주로 활동하게 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덜해졌다. 형식을 벗어난 글쓰기가 주는 해방감을 처음 맛보고 나니 나는 중독된 것처럼 그 느낌에 빠져들었다. 일기를 올리지 못한 두 달 동안 나는 오로지 나의 작업과 학업, 생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면서(여기까지는 지난 학기와 같다) 두 편의 에세이와 세 편의 영화 리뷰를 써서 올렸다. 재미없는 영화를 소재로 해서인지 아니면 내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상했던 것보다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에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의 타격은 더욱 컸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근 일주일 간 좀 더 이목을 끌 만 한 글감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사람들이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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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인턴을 그만둔지 석달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수입이 고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급증하는 바람에 다음 학기에도 온라인으로 강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개강을 했더라면 지금 일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 문득 인턴과 학업을 병행해야만 했던 지난 학기를 회고해본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둘 중 하나는 포기했겠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그때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처음 맡는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허덕이며 강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근무 연장을 하던 그때.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한들 그때처럼 할 자신은 없다. 큰 시련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무난하고 평탄한 내 삶에서 그때만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