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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0년 4월 20일

염세 2020. 4. 21. 12:06

 

 

 

4월 20일

 

  오늘은 다른 날만큼이나 평범한 하루였다. 좋아하는 글을 쓸 만 한 시간은 단 1분도 주어지지 않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날들 중 하루.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모 수업의 교수에게서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라...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말문이 턱 막힌다. 내가 사상으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10년이 넘었고 학문 분파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4년이 넘었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것은 터무니없는 반응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고 지적할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 중 하나를 꼽으라는 요구마저도 부당하게 느껴진다. 순간 속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울컥울컥 차오른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해나 개츠비의 코미디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오버랩 된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코미디는 그의 '마지막' 코미디쇼인 나네트였다. 그것을 보고 초반에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중반부터는 분노와 절망, 살기와 환희가 한 데 뒤섞이는 바람에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눈물만 떨궜다. 그때부터였다. 또 한 명의 여자가 죽을 때마다(그 소식이 모두의 귀에 들어갈 때마다) 또 한 명의 여자가 남자에게 맞다가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감옥에 갈 때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강간당하고 또 그 장면을 촬영당하고 드워킨의 표현대로 그가 죽어서 시체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도 포주질을 당하는 걸 보고 있을 때마다 나네트의 대사가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재생되었고 그것을 외면하려 들수록 그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더 크게 울렸다. 나는 좀 더 성의 있게 내 글(과제)의 독자(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권위 있는 기관에서 진행된 여성 인권 관련 통계를 발췌할 수도, 권김현영과 같은 비교적 대중적인 학자들, 아니면 좀 더 과격하게 1970년대에 활동했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만큼의 예지력과 통찰력을 겸비했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 - 파이어스톤, 드워킨, 밀렛 - 의 글을 인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통계나 이론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대신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해나 개츠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이야기와 학창시절에 나와 어울렸던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늦둥이 남동생을 업어 키워야 했던, 연년생의 남동생에게 주먹으로 맞고도 저항할 수 없었던,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전신에 멍이 들 때까지 두들겨 맞아서 앉아있기도 어려웠던 여자들의 이야기. 어떤 여자들은 학교에서 속옷 검사를 당해야 했고, 직간접적으로 이반 검열을 당했으며 어떤 여자들은 가족에게 선생에게 그리고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그런데 이는 어떤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사실이 못내 서럽다. 내가 그와 같은 일들을 겪어야 했던 것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었고, 겪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 어떤 것도 쉽게 바꾸지 못할 거라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는 남자들을 징벌할 수도, 여자들을 구원할 수도 없다. 그런 능력과 권한이 내게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여자들의 내일이 덜 고통스럽기를 혹은 적어도 다음 세대의 여자들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기도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친구인 J와 K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두 사람 모두 그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만큼의 자본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한들 그러한 걱정을 떨쳐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J와 K가 그런 선택을 한 이들 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나 역시도 수많은 다문화 가정의 딸들 중에서 가장 특혜를 입은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운이 나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얼마나 더 박탈당해야 하고 얼마나 더 선택을 제한당해야만 하는 걸까. 그들도 숨을 쉬고 피가 돌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인간들인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죽는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죽고 너무 빨리 잊혀진다. 반대 '진영'에 속한 이들에게 우리가 사람으로 여겨지기나 할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라 해서 자기 자신을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금수에게도 권리를 부여하니 마니 하는 논의가 오가는 이 살기 좋은 세상에서... 여자들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이들조차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남성들의 자비와 시혜에 기대야만 한다. 새삼스럽지만 여성이라는 지위와 그와 같은 위치에 점하게 됨으로써 받는 대우가 얼마나 모욕적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사태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어쩌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모순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에, 우리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너무나도 허술해 보인다는 것에, 그리고 우리가 경험이 없기에 다른 세계에 속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좀 더 무모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위기를 기회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질까? 조금이라도 이 모순이 해결될 기미가 보일까? 위기가 곧 기회라는 좌파들이나 믿을 법 한 그 말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면 다들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꼭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물론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적어도 그것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또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변화를 위한 미약한 노력이나마 할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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