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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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약이 다 떨어졌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것도, 동네친구인 H에게서 받은 것마저도. H에게서 받은 약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알바처에 챙겨가다가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약의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새끼손톱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동그란 노란색 알약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H는 약을 건네주면서 내가 처방받는 것보다 약효가 덜하지만 2~3시간 정도는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벌써 사흘째 약을 못 먹고 있다. 다시 전에 겪던 문제들이 발생했다. 나는 다시 무기력해졌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드는 것이 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잘 세워두었던 계획과 체계는 점점 모호해지다가 기억 저편으로 잊혀졌다. 나는 흘리지 말아야 할 물건(..
1월 4일 전례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R은 최저임금도 안 주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다. 나는 그저 매일 R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며칠전에 월급이 들어왔다. 50만원남짓의 돈이었지만 적금을 붓고 생활비에 보태기에는 충분했다. 월급이 들어온 날에는 몇 달 만에 애인이랑 데이트를 갔다. 우리 형편에는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랑 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식사를 하던 도중 옆자리 커플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는지 R은 내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는 잠시 대학이라는 공간의 속성과 기능, 누가 왜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보통 사람들의 방법론이 무엇인지와 그것을 체계적이라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잠시 논쟁했다. 너무 흥미로운 화두였기에 옆자리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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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오늘은 8시 반에 눈을 떴다. 어젯밤 알람을 설정하면서 제때 일어나길 몇 번이고 기도한 탓이다. 부엌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큰 식탁에 모여 앉아 속이 거북할 정도로 푸짐한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씻기 위해 곧장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수압이 약해서 샤워하는 내내 온몸에 미스트를 뿌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에 눈길을 끄는 물건을 발견했는데, 순백색의 폭신폭신한 샤워볼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태까지 본 다른 샤워볼과 차이점이 있다면 유난히 크고 폭신폭신하다는 점일 것이다. 늘 쓰던 대로 샤워볼에 물을 적셔 바디워시를 묻히니 엄청난 양의 거품이 일어서 몸 구석구석을 다 닦고도 남을 정도였다. 나는 이 샤워볼을 쓰는 것만으로 바디워시를 얼마나 아낄 수 있을지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몸..
7월 9일 책을 반납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꼭 읽어야 하는 것을 제외하곤 책도 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길 바랐던 만큼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연체된 지 오래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연체료가 불어나기 전에는 책을 반납해야 한다. 지금은 방학이다. 학교에 간들 아는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려워진다. 모든 익숙하고도 불편한 공간에서 자취를 감추고 싶다.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부담스럽다. 어쩌면 오늘이 책을 반납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기회’ 앞에서도 나는 한없이 미적거린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너무 편안해서 다시 위로 올라갈 필요조차 못 느껴진다. 어디까지 나빠질까 시험이라도 하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