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4월 20일 오늘은 다른 날만큼이나 평범한 하루였다. 좋아하는 글을 쓸 만 한 시간은 단 1분도 주어지지 않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날들 중 하루.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모 수업의 교수에게서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여성 문제라...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말문이 턱 막힌다. 내가 사상으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10년이 넘었고 학문 분파로서의 여성주의를 접한 지 4년이 넘었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것은 터무니없는 반응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고 지적할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 중 하나를 꼽으라는 요구마저도 부당하게 느껴진다. 순간 속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울컥울컥 차오른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애써 무시하려..
2017 카오스 과학 토론회 ‘과학은 논쟁이다, 과학 vs. 과학철학’ 보고서 정현 이 토론은 ‘과학은 논쟁이다, 과학 vs. 과학철학’이라는 제목으로 YTN 사이언스 채널에서 방영되었으며, 사회자 한 명과 각각 과학자와 과학 철학자를 대표하는 두 명의 패널이 토론에 참여했다. 토론의 기획 의도는 좁게는 양자 이론에 대한, 넓게는 과학 이론, 그리고 과학계 전반에 대한 각 분과의 관점을 대비하는 것이다. 토론은 질문의 내용에 따라 임의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만, 토론의 전체 주제는 양자 이론이라는 과학적 성취가 각 학계의 발전에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것으로 요약된다. 토론이 방영된 매체가 토론의 내용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판단되기에, 본고에서는 토론에 대한 본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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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시간은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번뜩이는 영감도 종이와 펜, 그리고 그것을 받아 적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살면서 그러한 순간을 얼마나 많이 지나쳤을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움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지난 몇 주 간 나는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버린 채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지냈다. 과제로 제출한 것까지 포함해도 강의 내용을 요약한 것, 혹은 실컷 공들였지만 서투른 영어 실력 때문에 글 전체의 수준까지 형편없어진 것들이 고작이다. 그런 것들도 글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량과 내용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메모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몇..
Q: 철학이란 무엇인가? - 과학과 종교와 대비해서 설명하시오. 과학과 종교의 정의, 과학계와 종교계, 철학계가 각각 제기하는 질문의 예시를 드시오. 그리고 어떻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 기술하고, 과학, 종교, 철학의 차이를 설명하시오. A: 철학, 과학, 종교는 모두 진리 탐구를 목표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 종교와는 구분되는 철학의 정의와 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철학이 과학, 그리고 종교와 맺는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좀 더 적절한 설명을 위해 일단 철학과 과학, 종교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에 착수하고자 한다. ‘철학’은 좁게는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부터 근대 철학과 그것의 영향을 받은 현대 철학까지, 서양 철학의 계보를 잇는 모든 철학 분과를 의미하고, 넓게는 비교적 신생 ..
2월 19일 오늘은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기대하기는커녕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연락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와 어울리곤 했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스터디를 했었다. 사실 나는 그가 스터디의 모임장인지(아마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아니면 불참이 잦았던 스터디 회원 중 한 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스터디가 파한 후에 나와 연락을 끊었다가 삼 년 후에 불쑥 나타나서 같이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정확히는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영업하는 에어비앤비를 경영해보지 않겠냐는)는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나는 나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게 답장하기에 앞서 몇 분 간격으로 생각에 잠겼다..
2월 2일 언젠가부터 글쓰기가 부담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애초에 왜 글을 쓰고 싶어했던 걸까.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해명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내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보기 좋게 포장된 문장들을 늘여놓으며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왜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가장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내게 유의미했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글을 썼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이자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치열한 생존 투쟁이 글쓰기였다. 사지가 찢기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내가 존재했노라고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사지에 ..
2월 1일 오늘은 수 년 간 알고 지내던 사람과 연을 끊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주변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서로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정보들과 140자 내외의 문장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주 쉬웠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좋아하고 동경했던 사람이지만, 내가 몇 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의 입지를 다져갈 때까지 내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이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늘 일정한 거리를 지켰기 때문에 그를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그가 나는 그처럼 되기에 실패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대변하게 되기까지 그가 거쳐갔을 법한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나는 그처럼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무결하고 많은 이들로부..
1월 2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죽은 듯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몇 년 전의 내가 저지른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실언을 떠올리고는 괴로워했다. 과거에 활동했던 단체들, 과거에 참석했던 모임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 그들에게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과 행동들. 나는 단 한 번도 그 모든 말을 기억해낸 적이 없다. 말들은 항상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얼핏 비추는 찰나의 진심, 일그러졌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얼굴만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괴로운 기억은 외면하려고 할수록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언젠가부터는 그것을 외면하는 것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