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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물

杜牧 <泊秦淮> 감상평

염세 2020. 11. 4. 17:34

본격적인 작품 감상에 앞서 먼저 시인인 두목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려 한다. 두목은 주로 당대 후기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문체와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두보와도 유사성이 있어 노두 두보의 뒤를 잇는 '소두'라 불리기도 했다. 두목의 시 중에서도 '박진회'는 그의 대표작으로, 심덕잠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에게 절창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 시의 갈래는 근체시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칠언절구로 분류될 수 있다. 근체시는 당대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엄격한 형식을 지닌 시 갈래이다. 근체시는 이전 시대의 시와 당대의 시를 구분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으로, 이전 시대의 시는 고체시로 분류된다. 그런데 당대에 생산된 모든 시가 근체시인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가 근체시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평측, 압운, 대구, 장법 등의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따라서 근체시 <박진회>를 감상할 때 그것의 주제의식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완성도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두목 <박진회>의 전문과 그 해석(출처 - 10주차 근체시3 문1 ppt 자료)이다. 

 

泊秦淮(박진회)

杜牧(두목) 

煙籠/寒水//月籠沙(연롱한수월롱사), 

안개는 찬물을 덮고 달빛은 모래를 덮는데

夜泊/秦淮//近酒家(야박진회근주가).

밤에 진회에 정박하니 술집이 가깝다.

商女/不知//亡國恨(상녀부지망국한),

기생은 망국의 한도 모르고

隔江/猶唱//後庭花(격강유창후정화).

강 너머에서 '옥수후정화'를 부르는구나

 

제목 '박진회'에서 '박'은 정박하다는 의미이고, '진회'는 남경에 위치한 진회하를 일컫는다. 즉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진회하에 정박하다'이다. 당시 진회하는 남경의 중심지로, 주변에 유흥가나 음식점, 주점, 숙박업소가 집중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박진회>는 배를 타고 남경으로 내려온 두목이 진회에 정박하고 며칠 묵어가려하던 때에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압운과 대구로, 이는 중국의 교과 과정에서 당시를 다룰 때에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칠언절구에 부합하는 <박진회>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그리고 네번째 시구의 마지막 글자가 운자에 해당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와 '가', '화'의 중국어 발음은 각각 'sha', 'jia', 'hua'(모두 1성)로 발음과 성조가 유사하여 운율이 느껴진다. 당시의 성조 구분은 현대 중국의 성조 구분과 차이가 있지만(1,2 성은 평성, 3, 4, 그리고 입성은 측성에 해당함), 당대의 성조 구분을 고려하더라도 'sha', 'jia', 'hua'는 모두 평성으로 같은 성조에 해당된다. 대구는 근체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기법으로 시구 간의 대구뿐만 아니라 한 시구 안에서도 대구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롱한수월롱사'에서 '연롱한수'(안개가 찬물을 덮음)와 '월롱사'(달이 모래를 덮음)는 대구를 이룬다. 또한 시인은 안개 때문에 뿌옇게 보이는 차가운 강물과 달빛이 모래를 비추는 모습을 중첩시킨다. 즉 '롱'의 반복적인 사용뿐만 아니라 시의 심상 또한 대구를 강화해준다. 시구 간에도 대구를 엿볼 수 있는데, 이를 테면 '상녀부지망국한'의 '망국한'이 '격강유창후정화'의 '후정화'에 대응되는 식이다. 여기서 언급된 후정화는 '옥수후정화'의 준말로, 남조의 마지막 임금인 진숙보가 후궁과 궁녀들이 부르게 할 목적으로 만든 노랫말이다. 방탕한 생활을 이어나간 진숙보는 전쟁에 패해 수나라의 포로가 되고, 후대에 이 노래는 '망국지음'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옥수후정화'를 '후정화'로 줄인 것은 '망국한'과 자수를 맞추기 위해서고, 소재로서 '후정화'는 '망국한'을 심화시킨다(혹은 더 나아가서, 예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진회하에 정박하는 도중에 강 건너편에서 기생이 옥수후정화를 부르는 것을 듣고 쇠락해가는 자신의 나라를 걱정한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는 나라에 대한 문인의 걱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의 고대시를 대표하는 것은 당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시 또한 당시로서 형식미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나의 이목을 끈 것은 시의 형식보다는 시의 주제와 그 내용이었다. 첫번째로는 내가 이 시의 형식적인 완전성에 대해 평가할 정도의 선행 지식이 없기 때문이고(중국 고대 시가 중 어떤 시가 다른 시보다 형식적으로 우월하다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연구자들의 평가를 알고 있어야 하고 학계 내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는 현대의 문학 비평 이론이 대체로 텍스트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텍스트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는 요소보다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된 사회 문화적 맥락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는 중세 중국에서 지배계층에 속하는(혹은 적어도 지배계층에 더 가까운) 지식인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 텍스트의 생산자는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국가가 쇠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원인은 지도자의 무능함과 나태함 때문임을 암시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도자가 지식인 계층의 간언을 수용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노랫말의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로 노래를 부르는 기생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간신, 즉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신하 및 측근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려 했다. 아마 이 텍스트를 소재로 정신분석 비평을 하고자 한다면, '상녀부지망국한'에서 간신과 측근에 대한 분노를 기생에게 투사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이러한 투사가 이루어졌다면 자연스럽게 왜 그러한 투사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 그는 기생의 이미지와 간신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시적 화자가 보기에 간신이 기생과 무지함이라는 성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의 사회 규범에 따르면 신하는 기생과 구분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신하와 기생이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서로 다른 범주로 구분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또한 신하와 기생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신하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면 기생의 성질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독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기생은 실제로 '망국한'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설령 기생이 '망국한'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두목을 비롯한 지식인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중세 중국에서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유일한 주체는 지식인이었기에 기생이 '망국한'을 이해하는 방식은 '망국한'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망국한'을 모르는 기생을 향한 시적 화자의 분노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기생이 '망국한'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기대가 있어야 한다. 혹은 실제로 그러한 사회적 기대가 있었다고 예측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생은 천한 신분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높은 신분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적 기대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기생은 '망국한'이 무엇인지를 알았거나 적어도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갖추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신의 무지를 기생의 무지에 빗댄 것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좋은 전략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기생이 정말로 '망국한'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다면 그것은 신하와 기생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고, 아니라면 기생은 '망국한'을 모르는 신하보다는 무지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시각에서 발견되는 것일 뿐이다. 중세 중국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망국한'을 모르는 기생을 타박하는 것도, 기생을 무지함의 상징으로 빗대는 것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으며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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