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할 일을 곧잘 미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이변이 생겼는지, 그러니까 그날따라 기분이 좋거나 몸을 움직일 기력이 남아돌았는지 아니면 그날도 늘 하던 대로 시간을 허비하다가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예감에 섬찟했는지 이유야 어찌됐건 그 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허비한지 꼬박 21일째에 문득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미처 감지 못한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삐죽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서 기름기가 껴서 번들거렸다. 계속 두피가 간지러워서 도저히 침대에 편히 누울 수가 없었다. 전기장판은 당장이라도 살을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고(충분히 낮은 온도..
12월 3일 배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나는 쉴 새없이 꼼지락거렸다. 외투 주머니에 있던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볼펜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휴대폰이나 피젯큐브 같은 것들의 행방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형 강의실의 맨 뒷줄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타자를 친다.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며 장을 쥐어짜는 듯한 복통에 대해 생각했다. 머릿속에서는 Mitski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의 히트곡이 아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앨범 수록곡의 가사가 입가에 맴돌다가 사라진다. 어제는 일기를 쓰다가 눈물이 쏟아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데는 새벽에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내가 노트북으로 일기를 쓰던 시점에 R은..
12월 2일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H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C가 모 여성 단체에서 인턴을 하고, J가 노동 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는 동안 나는 밥을 하고 빨래를 널고 남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올해 들어서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번 학기에도 그랬듯이 나는 어중간한 학점을 받아왔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졸업하기는 글렀다. 책을 좀 읽어보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도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쳐 보기도 전에 연체되었다. 그런 나날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기에 쓸 수가 없었다. 요즘은 체크리스..
근황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어떤 일에도 감흥이 없다. 점점 더 깊은 물속에 잠기는 것 같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 국경 안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국경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 – 그곳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고 있다 - 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에 나는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게 되겠지.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여기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의로 가득 찬 이 장소를 등질 수만 있다면. 내게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이 남아있고 그 어떤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11월 16일 처음부터 일기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일기라도 쓰지 않으면 도무지 못 버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미뤄뒀던 사랑니 발치를 했다. 발치 직후에 세 시간 동안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발치 부위를 압박하던 거즈를 떼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싹 가셨다. 마치 그 고통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며칠 동안은 이 고통을 감수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고 장을 보러 가서도 정작 사온 식재료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계획이 물 건너갔다. 고통이 가시자마자 발치 전에 샀던 다 식어버린 토스트를 다급하게 입 안에 쑤셔넣었다. 10시간 넘게 물도 음식도 못 먹은 상태라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
좋지 않은 소식들만 들려온다. 내가 증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소식이라든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원을 분배받고 그것을 독차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선한 사람들은 계속 시련에 처하고 악한 사람들은 벌받지 않는다. 너무나도 자명하고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애인이 부모 문제로 – 그가 응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유소년기부터 물리적, 정신적 학대를 학대를 당한 것 때문에 – 힘들어할 때 나는 정말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그에게 가해한 인간들을 찾아가서 죽일 수도 없고(심지어 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피해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해줄 수 있을 만큼의 경..
11월 12일 며칠째 쓰던 일기를 날려버렸다. 당연하게도 그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고, 완전히 내 예상 밖에 있는 일이었다. 개의치 않기로 했지만 문득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R이 상담소 소장님을 비롯한 상담사 분들의 호의로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게 된 지도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마침내 지난 주에 R은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문제를 언어화 하는 데 성공했다. 상담소 소장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짧아 보였던 그 상담사는 R의 얘기를 듣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한다.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상담사에게 전달하지는 못했겠지만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R은 드디어 정신적 외상..
10월 25일 마지막으로 일기를 올린 시점이 2주 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일주일이 한 달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나 자신은 물론 R 역시도 아직까지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말할 수 없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일에 말을 얹는 것 외의 일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기분 좋은 생각을 하려고 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들. 내가 즐겨하던 일들에 대해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미 뇌 전체가 무력감과 분노에 잠식당한 것 같이 느껴졌다. 오직 S가 떠나간 후에 피폐해진 정신으로 폐허가 된 집을 치우던 일과 집에만 오면 아..
여느날과는 다르게 상쾌한 아침이다. 아마 어제 푹 잘 수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한다. 술에 취한 채로 잠들면 피곤하다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아주 지쳐버리지 않는 한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난 잠에 들기가 두렵다. R만큼은 아닐지라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내 존재의 유한함을 상기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때문에 지쳐 쓰러져 잠드는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어제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는 바람에 속이 더부룩했다. 토하고 싶지 않아서 복약 시간을 뒤로 미뤘다. 학교에 가기 전에 간편죽이라도 먹고 가려 했건만. 씻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늦게 일어난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은 중한 번역 강의를 듣는다. 기껏 열심히 준비해간 번역 과제였지만 사실은 볼품 없는 결과물이었음을 실시간으로 확인..
10월 11일 번역 과제에 대한 발표를 듣는다. 발표자의 목소리부터 내용, 이를 전달하는 방식 그 모든 게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개운한 편인데도 계속 눈이 감겨온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열의를 가지고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과 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매일 아침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학교를 가게끔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떨군다. 나는 아무리 그러고 싶어한들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따분한 일을 차분하게 해나가는 데 의미를 찾는 저 성실한 사람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그 성실함을 거부하고 무언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될 수 없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