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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물

班固 <兩都賦> 감상평

염세 2020. 10. 18. 14:26

본격적인 작품 감상에 앞서 먼저 전근대 시기의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전근대 문학을 감상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닌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전근대인과 현대인은 다른 종류의 경험을 하고 살아간다. 이는 물적, 기술적, 경제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고, 정치 체제, 법/제도를 포괄하는 사회 구조로 야기된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경험의 차이가 가치, 규범, 관습, 언어 등 문화적인 차이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각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정치, (기술의 발전으로 추동된) 경제, 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긴밀하게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경험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이진 않을지라도 많은 경우에 타자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 경험의 차이는 현대인이 전근대 문학을 이해하는 것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례로, 우리는 순장과 팽형을 비롯한 반인권적이고 비인도적인 풍습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순장이나 팽형을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거나, 그 행위에 동의하거나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거나 그들과 동일시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근대인과 현대인은 같은 경험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전근대인과 현대인이 '(질적으로) 같은' (같은 맥락의, 의미의, 효과를 초래하는) 경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동일한 경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근대인의 말과 생각, 행위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를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현대인이 전근대인의 경험을 단편적으로라도 이해하는 방법은 당대의 유적이나 유물, 기록 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근대인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인데 앞서 언급된 것 중 기록에 대한 접근성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전근대인과 현대인 사이에 언어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는 장기간 동안 사용된 문자 중에서는 변천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진 편인데다가(물론 이는 그것의 사용자들이 강박적으로 의미 변화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전근대의 한문 서적들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번역되고 유통되고 있기에 전근대에 생산된 텍스트임을 감안하면 접근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때문에 현대인은 전근대인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에 실제로 교환되었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당시에 그것이 가졌을 의미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전근대인들의 경험을 접하는 현대인들은 동아시아의 전근대인들이라면 효행으로 평가했을 사건에 대해서 아동학대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근대인과 현대인의 경험의 차이, 그리고 동일한 경험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현대인에 대한 전근대 문학의 접근성과 독해력을 떨어트리는 주요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대의 많은 독자들은 전근대 문학을 구시대적이고 지루하며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긴다. 특정 시대의 시대상, 생활상, 가치와 규범, 윤리 등에 관심이 있는 아주 소수의 독자만이 전근대 시기에 생산된 문학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데, 그들조차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를 이해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렇다면 특정 시대에 관심이 많은 아주 소수의 독자에 해당되지 않는, 사회학 전공 강의를 성실하게 들어온 평균적인 학부 4학년생은 강의에서 다뤄진 초사와 한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이 과제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내놓을 것인가? 보통은 가장 인상 깊었던 텍스트로 <서도부>와 <동도부>를 꼽을 것이다. 굴원의 <이소>든 소식의 <적벽가>든 간에 지배 계층에 의해 생산된, 지배 계층의 독자를 겨냥한 것으로 전근대 시기 유럽의 귀족을 연상시킬 정도의 경제적 자본과 문화자본을 향유하거나 그러한 이들과 동일시하며 그들을 동경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텍스트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며졌지만 텍스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관직을 등용할 권한이 있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거다. 물론 이러한 텍스트로 신-마르크스주의 비평을 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마르크시즘 비평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텍스트 중 이 텍스트가 비평의 대상으로 선정되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성립 이전에 생산된 텍스트인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비평이 가지는 의미는 더더욱 희석된다. 그렇게 <이소>와 <적벽가>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서도부>와 <동도부>뿐이다. 일단 자신을 등용해달라고 권력자에게 호소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주제의 측면에서 다른 텍스트와 구분되기 때문이다). <서도부>와 <동도부>의 주제는 동도(낙양)의 우월성이고, 저자는 주제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서도(장안)를 상징하는 빈객과 동도를 상징하는 주인을 대비시킨다. 텍스트의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텍스트에 등장한,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사회 현상이다. 이 텍스트의 핵심 소재인 '지역색'이라는 개념과 그에 대한 관념과 믿음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회에서 통용된다. 서울과 부산의 대비, 그리고 도쿄와 오사카의 대비 또한 그러한 예시에 해당된다. 그리고 특정 지역을 다른 지역과 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민의 개성이 더욱 부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지역색'에 관한 담론이 주로 세력 다툼을 하는 두 지역 사이에서 가장 많이 형성되고 유통된다는 점이다. 서울과 부산은 대비될 수 있지만, 이 구도에서 부산과 동일한 권역에 속하는 울산이나 김해는 부산을 대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서도부>와 <동도부>가 집필되던 시기에 장안과 견줄 만 한 지역은 오직 낙양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전근대 국가의 도읍으로서의 장안과 낙양이 소멸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지역색' 담론에서 지역은 자주 의인화되며, 두 지역 간의 세력 다툼은 종종 '막상막하한 실력을 가진 기인들 간의 경쟁'으로 형상화된다. 이와 같은 '지역색' 담론은 상징성의 최고봉을 다투는(실제로는 이미 한 지역으로 세가 기운 상태고, 사람들은 그 미묘한 불균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래야만 만년 일등과 그의 뒤를 바짝 쫓는 2등이라는 서사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지역 간의 세력 다툼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학풍'과 '교풍'에 관한 담론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대치, 그리고 이를 강화시키는 의례로서의 '고연전'이 존재한다. 두 대학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두 학교는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행위는 한정된 상징 자본을 라이벌과 공유하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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