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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미친 여자들을 생각하다

염세 2019. 4. 2. 10:57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낡은 질문에 잠식당한다.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지 못한다. 답을 알지 못해서 앞을 향할 수 없다.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사실 나는 내 뒤에 무언가 있었으리라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면 못내 두려워진다. 왜 나는 그 질문들을 떨쳐낼 수 없을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오랜 습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물건을 쌓아두기를 잘한다. R과 동거하기 전에 나는 과자 봉지 하나조차도 제때 버리지 못했다. 나는 물건들을 사랑했다. 누군가 – 주로 나 자신의 체취가 남은 물건들. 과자 봉지, 페트병 뚜껑, 메모가 휘갈겨진 종이더미와 종이컵에 담아둔 담배꽁초들. 그 물건들은 공간을 차지하고, 몇몇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나는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다.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방관한다. 그(것)들을 방치한다. 그것을 떠나지도,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그저 그(것)들과의 관계에 묶여있다. 나에게 종속되었던 것들에 의해 종속된다. 누군가가 사슬을 끊으려 하지 않는 한, 혹은 내 눈앞에서 누군가 사슬을 끊으려고 몸부림치더라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웃는다. 아무 생각 없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그것은 너무나 깊숙이 체화되어 있어 조건 반사처럼 터져 나온다.

  미친 여자들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너무 가지고 싶어서 그를 멀리 내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엄마,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악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여동생과 같이 비교적 친숙한 여자들부터 남자를 너무 선망하는 바람에 그와 동일시를 해버린 여자, 피해를 전시하고 그것을 인정받음으로써만 인정받는 여자, 물건의 지위로 전락하지 못해 안달내는 여자, 그리고 예술가, 음악인, 시인까지. 광기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는 존재하는까? 지구 어딘가에는 그런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주변의 여자들은 언제나 미쳐있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는 진지한 질문이다. 주체는 생각한다.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유효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행위는 유효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생각(자신으로부터 기원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든 간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사람도 어떠한 방식으로 주체에 준하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라니... 온전한 자연 상태는 없다. 자연은 무엇이고 문명(사회)은 무엇이지? 이 모든 분류 체계가 인위적이라 주장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것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가?(그럴 수 없다) 혹은 미친 사람이 자신을 주체이거나 그것에 준한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주장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획득할 것인가?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는가? 그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면 그는 대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가 대변인을 할 권리를 획득하거나 쟁취할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없다. 난 지켜본다. 더 나은 행동을 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에... 하염없이 지켜본다. 혹자는 싸우고, 혹자는 체념하고, 혹자는 다시 일어선다. 어떻게든 현실에 맞서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럴 용기가 없기에, 나는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모든 것을 재단하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경험 – 나의 것이기도 하고 타인의 것이기도 한 것 - 을 자르고 붙이고 짜깁기하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가? 나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진실과 실체와 본질이 담론일 뿐이라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알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결국 믿는 수밖에 없나? 종교로 회귀하는 수밖에 없나? 그것 역시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다. 만약 종교만큼 성스럽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무언가를 발명해낼 수 있다면(수 세기 전에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좋을까? 좌파에게 마르크시즘은 종교와도 같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메시아고, 공산주의는 새로운 천국이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단언한 것일까. 무엇을 믿고...? 남성들, 그들은 믿음을 만들어내고 확산시킨다. 해방을 정의하고 기약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 어떤 것도 믿고 확신할 수 없는 여성들은 그 자신도 믿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데,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하면 이런 운명을 뒤바꿀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이미 규정된 현실의 상은 믿음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말을 꾸며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리가레와 식수처럼. 도둑처럼 훔치고 사기꾼처럼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무언가를 주장하다 보면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으로 기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을까? 여성의 언어가 남성의 것으로 둔갑하지 않는 한 그것은 진리도 법도 어쩌면 담론조차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남성의 것으로 둔갑하는 데 성공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믿고 싶다. 선과 정의와 해방의 기약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버릴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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