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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나에게 주어진 것

염세 2019. 5. 2. 17:31

  그 일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일기를 못 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제때 일어나고 제때 밥을 먹고 이따금씩 가까운 공원에 찾아가기도 한다. 나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 당장 거리에 나앉지도 않았고,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항상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데 비해 너무 많이 가졌다고 말한다. 아마 그들의 말은 일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특별히 재능이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많이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토록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은 정말 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저 온갖 풍파가 스쳐지나가고 지금은 다소 평온을 얻게 된 것에 불과하다. 어쩌다가 지금처럼 되었는지는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몇몇 일들을 극복했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니, 그렇게 되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상황을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그 시간들을 버텨냈을 뿐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 이 얼마나 축복받을 만 한 일인가. 내가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이 저절로 좋아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고통 받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처음으로 자유롭다고 느꼈던 때를 떠올린다. ‘관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는 내가 정말로 해방되었으리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했었다. 만약 나의 정신이 해방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육신은 어떠한가? 어쩌면 정신조차도 육체에 묶여있기에 그 명제는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 나는 해방을 가능케 할 힘도 의지도 능력도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었고 그것은 항상 인간이 뒤엎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누리는 모든 종류의 행운은 어쩌면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우연히 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와 누군가가 처한 상황은 뒤바뀔 수 있었다. 내게 그 말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에게 공감할 수 없고, 그의 상황이 나아지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보며 그는 가증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유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나는 항상 모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다른 여자들보다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다른 여성들에게 속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구타를 당하거나 강간당하는 여자들에게 속죄하기 위해서. 나는 차라리 내가 그들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운은 지각할 수도, 증여할 수도, 교환할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들을 대신하여 살아가고 감히 생존 그 이상의 것을 누릴 수 있는가. 나는 그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보다 못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한 결과일 뿐이고 사람이 죽거나 국가가 멸망하는 것에는 실은 아무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오직 그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러한 ‘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도 가치판단의 결과라 항변해야 할까. 나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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