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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운수 좋은 날

염세 2019. 12. 3. 21:53

 

운수 좋은 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할 일을 곧잘 미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이변이 생겼는지, 그러니까 그날따라 기분이 좋거나 몸을 움직일 기력이 남아돌았는지 아니면 그날도 늘 하던 대로 시간을 허비하다가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예감에 섬찟했는지 이유야 어찌됐건 그 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허비한지 꼬박 21일째에 문득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미처 감지 못한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삐죽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서 기름기가 껴서 번들거렸다. 계속 두피가 간지러워서 도저히 침대에 편히 누울 수가 없었다. 전기장판은 당장이라도 살을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고(충분히 낮은 온도로 조절했는데도),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나는 이불은 땀에 젖은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창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몸을 씻고 싶었다. 허벅지에 있는 작지 않은 크기의 화상 때문에 샤워하기가 망설여졌지만 세면대에서 머리 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워기를 틀고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머리를 헹구고 샴푸를 칠하고 다시 머리를 헹궈냈다. 시간을 더 끌고 싶진 않았기에 얼른 물기를 털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쌌다. 그후로는 모든 일이 정말 내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대로만 돌아갔다. 눈 앞에 있고 그게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빨래를 걷고 다 된 빨랫감을 널었다. 그러다가 입안이 텁텁하다고 느끼곤 양치를 하러 갔다. 거울로 구강을 확인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신경 쓰면서도 주변사람들에게 평이 좋은 비싼 가글액을 써보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양치를 끝마친 후에 나는 우연히도 더위를 잘 타는 내가 추위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옷 조합을 알아냈고, 왕복 2~3km 거리의 마트에 길 한 번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우연히 좋은 메뉴 구성이 떠올라서 요리 매니아들의 레시피를 확인해가며 재료를 골라 담을 수 있었고, 가까스로 예산에 맞게 담은 식재료들은 공교롭게도 일정 금액을 넘겨서 전체 금액에 대한 적지 않은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했던 여윳돈이 생겼고, 나는 굶주린 채로 길을 나서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퇴근길이라 지하철 안은 붐볐지만 공교롭게도 매번 앉을 자리가 생겼다. 내가 환승을 하고 다른 열차를 타고 가도 마찬가지였다. 30여분 동안 열차를 타다가 M가 기다리고 역의 출입구 쪽으로 올라갔다. 수 개월 전에 그를 본 후에 그를 다시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는 그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전보다 좀 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는 것 정도? M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는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 자질구레한 얘기들을 했다. M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M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방은 넓고, 두 개의 침대가 있어서 손님인 내가 그 중 한 침대에 앉아서 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침대 두 개가 들어가고도 여유공간이 있는 집. M의 방은 온통 그가 좋아하는 것들 – 그가 좋아하는 소설과 시집들 그리고 인형이나 장식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이 곳이 훨씬 집의 이상향에 가깝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좀 더 넓은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맑은 날에는 볕이 들고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베란다가 있는 집. 싱크대가 넓고 부엌에 조리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오븐이나 식기세척기를 둘 공간도 있었더라면. 그때 나와 R은 처음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 R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서재를 가지게 될 수도 있고, 텔레비전 대신 컴퓨터 본체를 장만하게 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온갖 행복한 상상들이 물에 이는 비누거품처럼 떠오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은 매우 강력한 것이어서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삶 전체가 달라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더 넓고 더 편안한 개인 공간, 더욱 사치스러운 여가 생활, 좀 더 질 좋고 오래 쓸 수 있는 생활용품, 더 좋은 식기와 조리도구들. 물론 실제로 그런 것들이 변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럴 때가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언제나 현실은 기대와는 조금씩 빗겨 난다. 그런 것들이 줄 수 있는 기쁨은 적지 않고, 한동안 지속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동안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M은 내게 갓 구운 고기와 과일을 대접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요기를 한 후에 우리는 각자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오늘처럼 작업과 작업에 관한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적은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었다. 어제부터 나는 연달아서 세 편의 글을 썼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 결과물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계속 이대로 할 수만 있다면 장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 두어도 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할 수만 있다면… 불행하게도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날이 운수 좋은 날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못할 것이고, 운이 따라주어 계획을 제대로 세운다고 한들 많은 경우 그것을 그대로 이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날이라 해도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여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그런 나날을 견뎌낸 후에는 사소한 행운으로 채워진 하루가 기적처럼 나를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행운에 대해 감사하며 다음 날부터 닥쳐올 시련에 대비하지만, 나는 그만 제 운이 다할까 봐 두려워하다가 돌아서면 그것에 도취하여 종일 요행을 바라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서 좀 더 좋은 것들을 취하는 것보다는 좀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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