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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지 않은 소식들만 들려온다. 내가 증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소식이라든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원을 분배받고 그것을 독차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선한 사람들은 계속 시련에 처하고 악한 사람들은 벌받지 않는다. 너무나도 자명하고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애인이 부모 문제로 – 그가 응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유소년기부터 물리적, 정신적 학대를 학대를 당한 것 때문에 – 힘들어할 때 나는 정말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그에게 가해한 인간들을 찾아가서 죽일 수도 없고(심지어 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피해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해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능력도 없다. 애인이 겪는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여성 해방이라는 거대한 난제 앞에서도 그러하듯이 무능해진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고작 이런 존재인 내가 해방이니 구원이니 운운하는 게 정말 너무나도 우습게 느껴진다. 대체 나를 사귀는 게 애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대체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그랬다. 이번에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죽고 싶고 사라지고 싶고 더 이상 존재하기를 그만두고 싶다. 내가 살아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 많이 가졌고, 그것 때문에 이미 많은 죄를 지었지만 속죄할 방법이 도무지 않다. 나는 내가 가진 무엇으로도 사람 한 명 구원하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회적 현실은커녕 개인적인 현실의 아주 일부분이나마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계속 여자 알바 노동자(심지어 지금은 고용된 상태도 아니다)로 살아가는 한 앞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을까.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 그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고상한 가치를 논하든 간에 실제로 나의 영향력은 너무나 미미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한 명 구원하지 못한다. 언젠가부터는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미물인데도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한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누릴 자격이 없다. 나와 비슷한 상황과 처지에 처한 그 모든 축복받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언젠가는 내가 숙청되길 바란다. 숙청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나의 죄값을 치를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계속 누군가를 구원하려 드는 것은 단순히 내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좀 더 괜찮은 곳이었다면, 그래서 더 좋아질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따위가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게 터무니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어왔다. 중학교 시절에 나와 어울리던 애들이 생각난다.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냉정한 현실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한 그들의 꿈과 소망들. 나는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쉽게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그들을 위해 무엇 하나 하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라서 괴롭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전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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