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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근황

염세 2019. 12. 3. 01:17

 

근황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어떤 일에도 감흥이 없다. 점점 더 깊은 물속에 잠기는 것 같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 국경 안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국경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 – 그곳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고 있다 - 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에 나는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게 되겠지.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여기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의로 가득 찬 이 장소를 등질 수만 있다면. 내게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이 남아있고 그 어떤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가능성이 없는 사회, 조금이라도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 텅 빈 얼굴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될까 봐, 아니 이미 그들 중 한 명이 되어버렸을까 봐,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사실이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믿을 만한 동료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그들의 실제 정치 성향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동경할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계속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갈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상이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줄기의 희망조차 앗아갔을 때 내가 언제든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와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진 사람. 민중시가에 등장하는 ‘바보 과대표’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참 좋겠지만 그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설령 그게 앞과 뒤가 다른 비열하고 야비한 이론가라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동경할 만한 사람이 정말로 필요하다. 수 백 만 번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지만 이번만큼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을 간절히 원한다. 사람들로부터 어떤 고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 맹목적일 만큼 순수한 열정을 보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그런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면 나는 어디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 그럴 수 없다면, 더 이상 그런 기대를 조금도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거나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은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기억해낸들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아주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쏟아지는 눈 속에 파묻히고 싶다. 그리고 내일의 해가 뜨기 전에 이 세상을 뜨고 싶다. 어떠한 방식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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