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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카오스 과학 토론회 ‘과학은 논쟁이다, 과학 vs. 과학철학’ 보고서

정현

  이 토론은 ‘과학은 논쟁이다, 과학 vs. 과학철학’이라는 제목으로 YTN 사이언스 채널에서 방영되었으며, 사회자 한 명과 각각 과학자와 과학 철학자를 대표하는 두 명의 패널이 토론에 참여했다. 토론의 기획 의도는 좁게는 양자 이론에 대한, 넓게는 과학 이론, 그리고 과학계 전반에 대한 각 분과의 관점을 대비하는 것이다. 토론은 질문의 내용에 따라 임의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만, 토론의 전체 주제는 양자 이론이라는 과학적 성취가 각 학계의 발전에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것으로 요약된다. 토론이 방영된 매체가 토론의 내용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판단되기에, 본고에서는 토론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과 논평에 앞서 먼저 이 토론의 매체적인 특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초래된 효과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토론자의 주장과 그 근거만큼이sk 방송의 기획·편집자의 의도와 그 효과를 염두에 둔 채로 논의를 진행해나갈 것이다.
  영상과 텍스트의 차이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매우 진부할뿐더러 불필요한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 부분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려 한다. 본고에서 토론의 매체적인 특성에 주목하고자 함은 텍스트로 기록된 토론문과 달리, 방송 토론에서는 기획자와 편집자가 토론의 내용을 결정짓는 데 유의미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형태로 기록된 토론은 토론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만큼, 편집자는 오탈자 및 문법적 오류 교정 이상으로 토론의 내용에 개입할 수 없으며, 토론의 기획 역시 토론 주제 및 토론자 선정 외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많은 경우 토론자가 기획·편집을 부분적으로나마 담당하기에 토론자와 기획·편집자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반면 방송에서는 토론자 외의 기획·편집자가 방송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의 분량, 토론자가 재현되는 방식, 심지어는 토론의 (명시적 혹은 암시적) 승패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토론에서는 토론자의 관점만큼이나 기획·편집자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이 토론에서 과학과 철학의 대립 구도는 사회자의 말과 태도, 자막 등을 통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과학과 철학은 각각 독립적인 분과이며, 세계관이나 방법론적 차이가 존재하나, 그것은 두 학문이 대립되는 성질을 가진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는 불충분하다. 과학계와 철학계의 관점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양자는 충돌하기보다는 상보 보완적인 면모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 자체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과학자라는 것을 인정한들, 과학과 과학계가 대중적인 신뢰를 얻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데는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지지하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기여가 컸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과 과학의 대립 구도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단지 진행의 편의성과 매체의 특성(오락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이러한 대립 구도는 사실관계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과학과 철학에 대한 청중의 이해를 증진시키기보다는 각 분과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이 방송이 청중의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가정했을 때, 토론 내용보다도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이 목적 달성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각각 과학자와 철학자를 대표하는 두 명의 패널은 양자 이론의 실재성이나 장기적인 전망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했으나, 양자 이론의 정의, 양자 이론의 핵심 내용, 양자 이론이 과학계(구체적으로는 물리학계)에 기여한 바, 양자 이론의 사회적 의의 등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이론물리학자가 과학자 전체를, 과학철학자가 철학자 전체를 대표하도록 한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한 명의 이론물리학자가 모든 이론 물리학자를 대변하는 것은 한 명의 인간이 전체 인간 종을 대표하는 것만큼이나 불충분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 공간의 제약, 능력 및 관심사의 차이로 인해 모든 사람을 공론장에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하도록 하는 상황은 일면 불가피하다. 고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사람이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이 너무 광범위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론물리학은 물리학에서도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정한 하위 집단이 집단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면 해당 하위 집단의 구성원이 집단 전체를 온전히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가 과학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적절한지, 과학철학이라는 아주 특수한 목적(과학에 대한 철학적 인식론을 형성, 발전, 검토하기 위함)을 지닌, 신생 철학 분과가 철학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론 물리학자가 과학자를, 과학 철학자가 철학자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과학자나 철학자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보다 유의미한 논의가 진행되기 위해서 왜 기획·편집자가 수많은 과학자 중 물리학자여야만 했는지, 왜 많은 철학자 중 과학 철학자를 선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과학자와 철학자의 관점을 대비하기 위해서 과학자와 철학자는 하나 이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접점, 즉 공통점이 없으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물리학자 중에서도 이론 물리학자를 선정해야만 했던 것은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양자 이론의 형성 및 확산 과정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며, 과학자 중에서도 과학 철학자를 선정해야만 했던 이유는 철학자 중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적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들은 과학 철학자뿐이기 때문이다. 즉 이 토론이 진행되기 위해서 이론 물리학자가 과학자 전체를, 과학 철학자가 철학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철학의 대립 구도는 더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통념과 달리 과학과 철학의 접점이 이 토론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송에서 기획·편집자가 지나치게 두 입장의 대립되는 점을 부각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분명 두 입장 간에는 명확하게 대립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를 ‘대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조차도 의문인데, 과학계와 과학적 발전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론을 발전시켜온 과학 철학자와 달리 과학자는 과학적 발전이 철학적 인식론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 철학자의 경우 실증주의적인 접근(구체적으로는 실험과 관측 등)을 통해서 증명이 불가능한(관측이나 측정하는 과정이 결과값에 영향을 미치지만, 실제로 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증명할 방법이 없다) 양자 이론이 철학적 인식론의 변화를 초래할 것임을 예고했지만, 과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양자 이론 또한 수많은 과학적 법칙 중 하나일 뿐이며, 양자 역학은 고전 역학과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인식론적 전환)에 관심이 없음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키며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법칙 자체가 얼마나 신뢰 가능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아닌, 이 법칙이 얼마나 적용 가능하며, 그것을 적용했을 때 얼마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가깝다. 사실 과학자들은 아무리 과학과 철학을 둘러싼 논의에 호의적이든 간에 과학적 발전의 의미를 과학의 영역 내에서만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과학 또한 담론의 일종이며, 과학계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관점을 거부하고, 과학을 다른 학문 분과로부터 분리하여 과학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는 데 동참한다. 문제는 과학자들 본인은 본인이 과학과 과학계에 대한 특수한 관점과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관측이나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대상의 실재성이 증명될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며, 과학에서 과학자 개개인의 해석이나 인식이 중요하지 않다고까지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과학 철학자의 관점에서는 쉽게 반박될 수 있는데, 과학 철학자는 과학자에 비해 과학을 역사의 산물로 보는 데 익숙하며, 새로운 실험 장치의 발명, 새로운 물질의 발견, 가장 궁극적으로는 과학 이론 체계 내부의 변화,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 실험 및 관측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 철학자에 비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르나, 과학의 역사와 과학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다. 물론 과학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새로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이와 같은 단편적인 정보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과학자가 과학자인 동시에 과학철학자일 때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토론에서는 철학자 패널이 과학자 패널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토론에서도 우세하지만 방송에서는 이를 정반대로 재현한다. 토론의 내용에만 집중했을 때 과학자 측은 철학자의 의의 제기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는 철학자 측의 문제 제기(대부분은 과학적 진리는 모든 경우에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변주이다)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러한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어떤 대상의 작동원리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완벽하게 밝혀졌다는 가정 하에 패러다임에 대한 문제 제기에는 의미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또한 그는 관측 혹은 측정 이전에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결어긋남 이론을 언급하였는데, 정작 그 이론이 어떻게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방송에서는 과학자 패널에게 발언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며, 그에게 발언을 마무리할 기회를 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과학자 패널이 토론에서 승리한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처럼 이 방송의 표면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기획은 결과적으로 과학자의 관점이 철학자의 것보다 우세하며, 과학이 철학에 비해 더 많은 권위를 획득한 것이 정당하다는 인상을 준다.
   본론의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에서는 토론의 매체적인 특성을 고려함으로써 토론의 내용과 재현 방식의 측면에서 기획·편집자가 토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효과가 초래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론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패널들의 입장과 관점의 핵심을 요약·정리하고, 토론에서 사용된 주장과 근거가 얼마나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평가했다. 토론의 기획, 진행, 재현 과정에서의 형평성이나 공정성 면에서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양자 이론의 정의와 핵심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양자 이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제고하고,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과학철학자와 이론 물리학자 간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과학 철학자를 패널로 선정함으로써 국내에서는 낯선, 과학 철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 마지막으로 이 방송이 과학뿐만 아니라 과학계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관련 분야의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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