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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과거와 미래

정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 분화된 페미니즘 사상, 이론, 운동으로, 초기에 운동으로서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이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회 운동이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페미니즘 운동은 1960~1970년대에 부흥기를 맞으면서 본격적으로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는데, 이러한 분화가 가능해진 것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이 참정권 쟁취 외의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은 근본적인 억압 기제(가장 대표적으로는 가부장제, 때로는 섹스/젠더 체계라고도 표현되는 체제)를 문제시하고 이를 전복하기보다는 교육 및 기회의 평등 등의 '표면적인' 평등을 추구하였고,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사회 불평등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불만 또한 제기되었다. 이에 급진주의 페미니즘 진영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과 다르게 여성의 권익을 최우선 순위로 두었고, 각각의 의제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가 가능했던 원인을 밝혀내고 이를 전복시킬 만 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고, 급진주의 페미니즘 이론은 이러한 사상을 좀 더 정교화하고 구체화한 것이다.

  로즈마리 통에 따르면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급진적-자유주의론 페미니즘과 급진적-문화적 페미니즘, 크게 두 가지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가 항상 적절하거나 대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많은 이들이 이와 유사한 모델을 제안하였고 다수의 페미니스트가 이를 수용했기에 편의상 이러한 분류 체계를 사용하겠다. 로즈마리 통은 몇 가지 기준으로 급진적-자유주의론 페미니즘과 급진적-문화적 페미니즘을 구분하였는데, 그 기준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섹슈얼리티,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성에 대한 관점이 포함되었다. 그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여러 쟁점을 통해서 페미니즘 사상을 구분하려했지만, 그 기준이 너무 모호했기에 로즈마리 통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게일 루빈을 같은 범주의 페미니스트(급진적-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로 구분하는 실수를 저지른다(이는 그가 성 자유주의, 즉 성 해방주의와 광의의 자유주의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분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것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극단적으로 의견을 달리 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통은 여성성과 남성성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 이들을 급진적-자유주의론 페미니스트로 분류했고,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거나(대개 여성이 도덕적으로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기존의 여성성도 남성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에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을 급진적-문화적 페미니스트로 분류하였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점에 따른 구분은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로즈마리 통 역시도 이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급진적-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제한하는 것을 가장 극단적인 여성 억압으로 여긴 반면, 급진적-문화적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본문에서는 여성의 성적 욕망 및 실천 등)조차도 남성 지배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심지어 남성에 의해 구성되기까지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급진적-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로는 모든 일탈적인 성적 실천(포르노그래피, 사도마조히즘, 세대 간 성애)을 적극 옹호하는 게일 루빈을, 그 정반대편에 선 인물로는 케이트 밀레트, 안드레아 드워킨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급진적-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는 임신 가능성이 여성이 피억압 집단이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자 여성 해방을 위해 기술을 통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여긴 반면, 급진적-문화적 페미니스트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고유한 영역이자 결함이 아닌 능력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결코 폄하되거나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모성에 대한 태도도 이와 유사하여, 급진주의-자유주의론 페미니스트는 모성을 여성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된 것으로, 급진주의-문화적 페미니스트는 모성을 여성의 재생산 능력의 부산물이자 남성과 구분되는 본질적인 속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동시에, 혹은 일관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충분히 유의미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로즈마리 통의 저서 <페미니즘 사상>에서 다루어지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 중 과반수는 그러한 분류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다(대표적으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케이트 밀레트, 메리 댈리 등). 그렇다면 그의 분류 도식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만 한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하위분류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면,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범주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충분할 것이다. 모든 범주가 (관념적으로) 해체될 위기에 처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무엇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구성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구분되는,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되는 사적 영역에 주목한, 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페미니즘인가? 아니면 여성들 간의 계급적인 차이에 주목하지 못한,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인가? 여성이 억압받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 능력(여기서는 임신, 출산에 한정한다) 때문인가, 아니면 남성 중심의 친족 체계가 정립되었기 때문인가? 만약 두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둔다면 여성 해방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제공할 필요가 있는 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기획은 계속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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