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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의 육체라는 아카이브: 2000년대 백윤식 캐릭터의 모호성과 포스트 IMF’를 읽고

정현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에서 편찬한 <그런 남자는 없다>를 읽던 중에 한 편의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중년 남성의 육체라는 아카이브: 2000년대 백윤식 캐릭터의 모호성과 포스트 IMF’라는 제목의 글인데, 제목만으로는 내용과 전개 방식을 추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했다. 저자인 부찬용은 백윤식이 출연한 영화에서 백윤식 캐릭터를 발굴해내고, 그에게 트랜스내셔널리티를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윤식의 트랜스내셔널리티를 특수하다고 주장하고, 대안적 남성성으로서 작동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한다. 부찬용은 백윤식 캐릭터를 발굴하기 위해 백윤식이 출연한 다수의 영화‧드라마를 인용, 비평하였는데 이 때문인지 이 글은 논문의 형식을 띤 비평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글의 내용과 논리 전개 방식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문단에서 부찬용은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백윤식 캐릭터를 추출해낸다. 백윤식의 캐릭터는 오묘하고 모호하며, 이는 불가사의함으로 연결된다. 혹자는 이를 거세당한 아버지나 대안적 아버지로 해석하지만 저자는 백윤식 캐릭터를 ‘중년 남성의 육체 해부 욕망’에 초점을 둔다. 두 번째 문단에서 그는 백윤식 캐릭터를 성룡, 존 웨인 캐릭터와 대비하면서 외국어의 사용, 다국적인 소품들, 국경을 넘나드는 중년 남성 캐릭터 내러티브가 백윤식 캐릭터에게 트랜스내셔널리티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문단에서 그는 블리스 림의 ‘유령성’ 개념을 언급하며 백윤식이 지니는 트랜스내셔널리티의 특수성(뿌리를 제거함으로써 역동성을 상실하고 지박령의 모습을 띰)을 강조한다. 같은 문단에서 부찬용은 양복의 이미지를 하드 바디(트랜스내셔널리티), 얇은 다리의 이미지를 소프트 바디(내셔널리티)와 연결시킨다. 이어서 그는 백윤식의 트랜스내셔널리티를 박정희 정권, IMF라는 시대적 배경의 산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백윤식 캐릭터를 중년 남성의 육체로 환원시킨 후에 이를 ‘유령 아카이빙’의 형태로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백윤식 캐릭터가 가까운 과거뿐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도 유의미할 것이라 진단하며 글을 마친다.
  백윤식 캐릭터를 트랜스내셔널리티라는 측면에서 사유하는 부찬용의 관점은 어느 정도 참신하게 느껴진다. 일단 백윤식이라는 중년 남성 캐릭터를 중년 남성의 육체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대다수의 영화 평론은 여성을 육체로 환원시키고, 남성만을 정신과 육체를 고루 갖춘 인격체로 묘사한다. 남성 캐릭터를 남성의 육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글의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육체의 심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내셔널리티라는 소수자성, 약자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속성을 불가해성, 유용성과 연결시킨 점도 인상 깊다. 이 글에서 트랜스내셔널리티는 불가해하기에 외려 유용한 속성으로 등장한다. 백윤식 캐릭터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은 그가 국경을 넘나들어 활동할 수 있게 했고, 그의 모호한 정체성은 그를 적으로부터 보호했다. 또한 한국인인 동시에 외국인이고, 그와 동시에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백윤식 캐릭터는 내부인과 외부인 간의 경계를 흐린다. 이는 타자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뒤흔드는 사유 방식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퀴어니스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상정하는 대신 모든 존재에게서 퀴어니스를 발굴해내려는 현대 퀴어 이론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뿐 아니라 백윤식 캐릭터의 남성성은 전통적인 남성성이나 현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아닌 주변적 남성성으로서 대안적 남성성으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저자는 주변적 남성성을 재해석함으로써 그것을 대안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다른 한편으로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진부함은 이내 불편함으로 바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성성을 백윤식의 육체에 환원하는 관점은 남성의 신체(육체)와 남성성 사이의 연결을 강화한다. 본문에서는 하드 바디와 소프트 바디의 이미지를 대비하기 위해 백윤식의 육체를 언급했으나, 정작 백윤식 캐릭터의 속성은 그의 육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 육체는 갈색일 수도, 검은 색일 수도 있었다.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으로 보이는, 혹은 성별이 모호한 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감독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계 한국인 남성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며, 저자인 부찬용은 이러한 점에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둘째, 한국계 한국인에게서 트랜스내셔널리티를 발굴하려는 시도는 기만적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과 혼혈은 국가의 관리 대상이자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 마땅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적 관습을 한국 정부의 구미에 맞게 개조하는 것이 그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소수자성은 모두에게서 발견될 수 있고, 정체성은 고정적인 범주가 아니라는 반박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두가 억압받고 있다는 주장은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정도의 억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용한 인식론으로서 트랜스내셔널리티를 사유하는 것과 실재하는 이주민, 혼혈이 겪고 있는 문제에 초점을 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셋째, 트랜스내셔널리티를 ‘유용한 타자성’으로 보는 시각은 위험하다. 일단 트랜스내셔널리티는 타자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비체성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것은 공포감을 주고, 위협적이거나 인식 불가능하다. 성별이 모호한 사람이 비체화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셔널리티가 모호한 사람은 비체화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트랜스내셔널리티는 유용성으로만 사유될 수는 없다. 외국어 구사 능력은 트랜스내셔널리티의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을 보여주며, 모든 이주민, 혼혈이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트랜스내셔널리티는 관습을 거부하거나 재해석하는 유연성을 주지만, 그 유연성 때문에 취약해진다. 부찬용은 백윤식 캐릭터가 취약한 것은 내셔널리티 때문이라 하지만, 트랜스내셔널리티는 전능성이 아니며 취약성 그 자체이다. 마지막으로, 남성의 남성성을 대안적 남성성으로 제시하는 관점은 진부하다. 주디스 핼버스탬은 일찍이 자신의 저서 <여성의 남성성>에서 남성의 육체-남성-남성성의 구도를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남성의 육체-남성-남성성의 구도를 해체하지 않고 대안적 남성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한가? 남성성을 보편성, 특권성과 분리하지 않으면서 남성성으로부터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가능한가? 적어도 이 글은 그러한 질문에는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백윤식 캐릭터를 트랜스내셔널리티라는 측면에서 사유한 이 글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남성의 육체와 남성의 필연성을 가정하는 관점은 어떤 이들을 배제하는가? 이주민이나 혼혈에 대한 고려 없이 한국계-한국인의 트랜스내셔널리티를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타자 혹은 비체의 주체성을 논하는 것은 어떤 구조에 힘을 실어주는가? 남성성이 특권성이 동의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는가? 혹은 더 나아가서 재전유와 전복, 모든 존재에게서 소수자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어떤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어쩌면 ‘원본’을 고려하지 못한 재전유는 이미 폭력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탈-정체성 정치가 탈-정치화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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