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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접근 방식으로서의 노자 사상 - <도덕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현

  여태 서구 중심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첫째는 탈-식민주의 철학이고, 둘째는 비-서구권의 문학, 역사, 철학의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전자가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관 또는 가치체계의 대안을 제공한다. 노자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은 그동안 저평가된 동아시아 철학의 가치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노자 철학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품으로 전락한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혹자는 노자 철학의 실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무의미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실용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자본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의미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은 다 무가치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는 ‘실용성’을 ‘경쟁력’ 혹은 ‘생산성’의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용성’을 ‘삶을 건강하게 영위하는 능력’으로 재-정의한다면, 노자 사상은 충분히 ‘실용적’이다. 그렇다면 노자 철학의 ‘실용성’을 뒷받침해줄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특히 이 글에서는 <도덕경>을 중심으로, 학문적 접근 방식으로서 노자 사상이 지니는 가치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는 <도덕경>에서 드러나는 노자의 서술 방식이다. 이는 크게 불확실한 종결어미와 다의적 서술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불확실한 종결어미는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도의 불확실성과 불가지성을 드러내는 한편, 확언하기 어려운 것이 도에 가깝다는 노자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다. 불확실한 종결어미는 도의 속성을 기술한 대부분의 장에 포함되었으나,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4장이다.

道, 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이처럼 노자는 ‘-이다’로 대표되는 단정적인 종결 어미 대신 ‘-와 같다’, ‘마치 -인 듯하다’는 불확실한 종결어미를 사용하고 있다. 노자의 도에 접근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학문적 접근 방식과도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학술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은 ‘-이다’와 같은 단정적인 종결 어미를 피하고, ‘-의 관점에서는’ -라고 볼 수 있다’, ‘-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하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학술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노자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노자의 서술 방식은 현재까지 학문적 접근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노자의 서술 방식 중 하나인 다의적 서술은 다시 중의적 표현과 모순적 표현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중의적 표현은 대체로 접속사 ‘而(이)’의 해석에 의해 발생한다. 이는 모호한 종결 어미보다도 빈도 높게 등장하는 서술 방식이며, 대부분의 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덕경> 제5장에서 ‘虛而不屈, 動而愈出’라는 구절은 ‘텅 비어 있으나 작용이 그치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생명력이 넘친다’로도 해석 할 수 있고, ‘텅 비어 있어서 작용이 그치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생명력이 넘친다’로도 해석할 수 있다. 원래 접속사 ‘而(이)’는 순접과 역접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도덕경>에서는 순접으로 해석하든 역접으로 해석하든 모두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는 다의적 서술의 두 번째 요소인 모순적 표현 때문이기도 하다. 노자는 세간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특성들(무, 유약함, 여성성 등)을 긍정하고, 그것의 가치를 역설한다. 특히 모든 유의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무의 가치를 긍정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적 배경이 위와 같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모순적 표현은 주객이 전도된 서술에서도 드러난다. <도덕경>에서 등장하는 ‘萬物作’이라는 구절에서 ‘作’은 타동사이기에 이 구절을 직역하면 ‘만물이 무언가를 자라게 만들다’가 된다. 그런데 문맥상, 만물이 목적어이자 주어이기에 이 구절의 속뜻은 ‘만물이 스스로를 자라나게 하다’이다. 이처럼 사고의 전환을 추구하려는 노자의 자세는 학문적 접근 방식에 적용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보는 능력은 연구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다.
  둘째는 <도덕경>에서 드러나는 태도이다. 노자는 9장에서 덜어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들고 있는 것은 버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노자에게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채우는 것보다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을 덜어내는 일을 강조하기에, 혹자는 노자를 반-지성주의자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자는 당대에 손에 꼽을 만한 지식인인데다가 지식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장은 반-지성주의보다는 반-엘리트주의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도덕경>이 보급되도록 식자층이 잘 쓰지 않는, 가장 쉬운 글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식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지식을 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없는 상태에서 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학문적 접근 방식에 적용해보면, 지식을 더는 과정은 지식의 편집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정보들이 지식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더하는 것만큼 더는 것이 중요하다. 연관성이 있는 정보들끼리 모이고, 연관성이 없는 정보가 빠져야만 지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는 학술적 글쓰기를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잘 쓰는 것만큼 잘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문장보다 더 좋은 문장이 강조되려면 좋은 문장도 과감하게 지워야 한다. 덜 좋은 문장을 지움으로써 좋은 글은 완성된다. 뿐만 아니라 노자는 평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세간의 평가에 대한 그의 태도는 ‘총욕약경’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대개 천재를 동경하지만, 그들이 천재라 불리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모두 비슷한 기준을 토대로 판단하는데, 그 기준에 충족하는 천재는 과연 천재가 맞을까? 혹자는 ‘진정한’ 천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고도 한다. 우리가 알아보는 천재는 우리보다 아주 살짝만 앞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앞서면 지금 시대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잘해봐야 몇 세기 후에나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칭찬과 비난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것은 화자의 경험과 지식, 가치체계에 따른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정답은 없다. 이는 기존 가치체계의 절대성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희망적이지만, 아무런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절망적이기도 하다. 희망 속의 절망이자 절망 속의 희망이다. 이를 해체주의적 입장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노자가 지식의 상대성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낸 노자의 사상으로 학문적 접근 방식을 고안해내려는 시도는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노자가 지식, 혹은 학문 자체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가 사상 역시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학문일 수 있고, 학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학문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학문에 기댔고, 언어의 불완전함을 감수하고 <도덕경>을 저술했다. 그는 특정한 가치를 배제하려 하지 않는다. 노자는 심지어 대립하는 특성들조차도 대립항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경> 2장에 드러난 것처럼, 긴 것은 짧은 것이 있기에 길 수 있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있기에 높을 수 있다. 천재는 둔재가 있기에 천재인 것이다. <도덕경>은 이 거대한 모순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도덕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내용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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